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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한달]잊혀진 참사…잡초에 묻힌 위령탑

최선 기자I 2014.05.15 21:00:00

정부·유족, 참사 때마다 재발 방지 차원 위령탑 건립
관리주체 불명확해 여론 관심 떨어지면 ‘나 몰라라’

성수대교 위령비(왼쪽)와 그 앞을 가로지르는 도로의 모습. 추모객들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사진=채상우 기자)
[이데일리 박보희 최선 채상우 기자]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가 무너져 내렸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 다리가 붕괴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32명이 목숨을 잃었다.

서울시와 유족들은 건설사의 부실 공사와 감독 당국의 허술한 관리 탓에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참사를 잊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위령비를 세웠다.

20년이 지난 지금 성수대교 위령비는 도심 속 ‘고립된 섬’으로 남아 있다. 성수대교 위령비는 한남동 방면 강변북로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어 걸어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차량을 이용해도 이정표가 없어 위치를 모르는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다. 주차장 입구는 화분으로 막혀 있다. 주차장과 위령비 사이는 또 다른 도로가 추모객을 가로막고 있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참사, 씨랜드 화재사고…. 수십 수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재발 방지를 약속하며 위령탑과 추모공원을 세웠다.

‘희생자들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아 세운 위령탑과 추모비들은 시간이 지나면 빛바랜 기억으로 남는다. 끔찍했던 사고도, 사고로 세상을 떠난 이들도 함께 잊혀진다. 관리 주체조차 없어져 지역사회의 애물단지로 전락하기도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과거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는 없다’고 했다. 과거를 잊은 우리에게 돌아온 대가가 세월호 참사다.

◇ 정부기관 간 등 떠밀기로 위령탑 관리 ‘엉망’

성수대교 참사 당시 8명의 무학여고 학생들이 등굣길서 세상을 떠났다. 이 학교 심종순(50) 교사는 매년 10월 21일이면 학생들과 성수대교 위령비를 찾는다. 그는 “방문 때마다 주차장 개방 문제로 성동구청에 방문 신청을 해야 한다”며 “위령비와 주차장 사이 도로 때문에 위험해 이곳을 찾을 때마다 아이들이 다칠까 걱정이 많다”고 말했다. 성동구청은 성수대교 위령비 주차장을 무단으로 이용하는 차량을 막기 위해 평소에는 주차장을 폐쇄해 놓고 있다.

김하균 성수대교 유가족 대표는 “위령탑을 세우고 나서 뒤늦게 위령탑과 주차장 사이에 도로가 생겼다”며 “이 문제로 수년간 여러 곳에 민원을 냈지만 횡단보도 하나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안된다며 다들 책임을 미루기만 했다”고 말했다.

성수대교 위령비를 조성하고 담당했던 공무원들은 모두 퇴직했다. 관리 매뉴얼이나 지침도 함께 사라졌다.

성동구청 관계자는 “위령탑 관리 주체가 불분명하다”며 “성동구 관할 내에 위치하고 있어 조경관리 등은 하고 있지만 언제, 어떻게 성동구에 위임됐는 지 몰라 보수 등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이라고 전했다.

인천 연안부두 바다쉼터에 세워진 ‘금양호 위령탑’을 찾는 외부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인천 중구청 관계자는 “이곳에서 주민들이 술을 마시는 등의 이유로 쓰레기가 상당히 많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사진=금양호유가족대책자문위원회 제공)
금양호 침몰 사고 이후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인천 연안부두 바다쉼터에 세워진 금양호 위령탑도 관리 상태가 엉망이다. 금양호는 2010년 3월 침몰한 천안함 실종 장병 수색에 나섰다가 캄보디아 화물선과 충돌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선원 2명이 숨지고 7명이 실종됐다. 정부는 이들을 의사자로 인정했다. 희생 선원을 기리는 금양호 희생자 위령탑도 세웠다.

그러나 불과 4년 만에 금양호 위령탑은 애물단지가 됐다. 조명등은 깨지고 쓰레기가 쌓여 있는 등 훼손과 오염이 심각한 상태다. 유족들은 위령탑 소재 지자체인 인천 중구청이, 인천시 중구청은 위령탑 건립을 주관한 수협이 관리를 맡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수협은 위령탑 건립비 집행과 1회 추모제를 개최했을 뿐 그 뒤로는 정부에 관리 책임이 있다고 팔밀이를 했다.

김순환 금양호유가족대책자문위원장은 “위령탑을 세울 때 가졌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먼저 간 희생자는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뜬 것”이라고 말했다.

◇ 삼풍백화점 참사 위령탑은 양재 시민의 숲에

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억되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6월29일, 수일 전부터 벽에 금이 가고 물이 새던 삼풍백화점은 수천명의 손님들을 품에 안고 무너져 내렸다. 502명이 숨졌고 937명이 다쳤다.

정부와 유족들은 1998년 삼풍백화점 참사 희생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위령탑을 세웠다. 위령탑은 양재 시민의 숲에 건립됐다. 희생자 보상금 마련을 위해 삼풍백화점 터가 민간에 매각된 때문이다. 삼풍백화점 터를 사들인 건설사는 이곳에 고급 주상복합아파트를 세웠다. 150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대형 참사의 현장엔 사고를 기억할 수 있는 동판 한 장 놓여져 있지 않다.

서울 ‘양재 시민의 숲’에 마련된 삼풍백화점 붕괴 희생자 위령비 앞에 국화꽃 한다발이 놓여 있다. (사진=채상우 기자)
시민의 숲에 세워진 위령탑도 유족들 외엔 찾는 이들이 드물다. 이곳 또한 관리 매뉴얼이나 지침 등은 남아 있지 않다. 관할 지자체인 서울시는 조경관리 정도만 신경을 쓴다.

서울시 동부공원사업소 관계자는 “관리 매뉴얼 등 관련 문서가 남아 있지 않고 업무 인수인계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예산이 없어 잔디를 깎고 나무 가지치기를 해주는 정도가 전부”라고 말했다.

44년 전인 1970년, 제주 서귀포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하던 여객선이 침몰하면서 326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악의 해상사고로 기록된 남영호 참사다. 남영호 참사는 오랜 기간 잊혀진 채 방치돼 왔다. 서귀포시의 노력 덕에 지난해 12월 15일 유가족 등 관계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수십년 만에 위령제가 다시 열렸다. 서귀포시가 추모사업을 추진하면서 유족들을 수소문했지만 관련 서류조차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없어 어려움이 컸고, 유족들의 의견을 모으는 데도 애를 먹었다.

서귀포항에 세워졌던 위령탑은 1982년 서귀포항 임항도로 개설로 서귀포시 상효동 법성사 인근으로 옮겨진 뒤 세상과 격리된 채 잡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서귀포시는 연내에 위령탑을 정방폭포 인근 해안으로 이전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정윤창 서귀포시 기획계장은 “재난사고가 잇따르면서 시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추모 분위기를 재조성하자는 차원에서 남영호 참사 추모 사업을 시작했다”며 “사업을 시작한 지 불과 몇 개월 뒤에 세월호 침몰 사고가 발생해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말했다.

◇ ‘참사 잊고 싶다’ 위령탑 설립 반대도

심지어 지역 주민들이 위령탑 설립을 반대, 희생자 유족들의 상처를 헤집은 경우도 있다. 1999년 6월 경기도 화성시에서는 수련회를 떠난 유치원생과 교사 등 23명이 화재로 목숨을 잃는 씨랜드 참사가
1970년 326명이 목숨을 잃은 남영호 침몰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위령탑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사진=서귀포시청)
있었다. 당시 화재로 채 피어보지도 못한 19명의 어린 생명들이 세상을 떴다.

정부는 씨랜드 참사 이후 어린이 안전교육을 강화하기 위해 서울 송파구 마천동에 어린이 안전공원을 세웠고, 유족들은 이곳에 추모비를 건립하기로 했다. 어른들의 이기심에 희생당한 아이들을 잊지 말고 어린이 안전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자는 취지에서다. 그러나 이 지역 주민들은 ‘어린이집이 있던 송파구 문정동에 추모비를 건립하라’며 관계기관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반발했다. 공원 안에 추모비가 세워지면 ‘분위기가 우울해지고 자녀 교육에도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잊지 말자’고 세우는 추모비나 위령탑이 ‘잊고 싶은’ 사람들에겐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

유가족들의 노력 끝에 추모비는 2001년 예정대로 세워졌지만, 유족들이 그때 받은 상처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은 화인(火印)으로 남아 있다. 이경희 씨랜드 유가족 부대표는 “여전히 주민들은 추모비를 혐오시설로 생각한다. 추모비는 아이들의 넋을 기리고 또 다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세운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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