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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잇겠습니다"…'민중운동 큰 어른' 백기완, 마지막 배웅

이소현 기자I 2021.02.19 14:57:53

19일 서울대병원에서 발인식으로 시작
대학로 노제와 서울광장 영결식까지
전통 장례 형식..1000여명 추모객 모여

[이데일리 이소현 기자] 지난 15일 89세를 일기로 영면에 든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발인식과 노제, 영결식이 19일 엄수됐다. 유족을 비롯해 수백여명의 추모객들은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한국 민중·민족·민주 운동의 큰 어른인 백 소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했다.

고(故)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운구행렬이 19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을 지나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사회장 장례위원회(장례위)는 이날 오전 8시 서울대병원에서 발인제를 열었다. 영정 속 고인은 검정색 두루마기를 입고 백발을 날리며 오른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발인이 시작되자 상주인 아들 백일 씨는 “안녕히 가세요. 아버지 뜻을 잇겠습니다”라며 고인의 영정 앞에서 절을 올리고 목놓아 울었다.

장례식장 밖에선 장송곡이 울려 퍼졌고, 추모객들은 고인이 만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놓아 불렀다. 또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의 일부가 쓰인 백 소장의 흑백 사진을 들고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발인식 이후에 백 소장이 설립했던 통일문제연구소, 생전에 즐겨 찾던 학림다방 등 대학로를 돌며 1시간 동안 풍물단이 운구행렬을 이끌며, 노제를 열었다. 노제에 참여한 전체 인원은 약 300명에 달하는 규모로 2개 차로에서 이동했다. 장례위 측은 방송차량을 통해 ‘앞뒤 간격 1.5m를 유지해 달라’고 안내했다. 경찰 측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에서 관혼상제 및 국경행사에 관한 집회에 대해서 기존의 규정을 적용하지 않게 돼 있어 운구행렬은 집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고(故)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이 19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광장에서 열리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운구 행렬은 대학로에서 출발해 이화사거리, 종로 5가, 종각역 사거리, 세종로 사거리를 거쳐 서울광장으로 향했다. 종각역 사거리에서는 거리굿을 진행했다. 이후 오전 11시 30분께 서울광장에서 불을 켜는 것을 시작으로 1시간 30분간 영결식이 엄수됐다.

영결식 현장은 무대를 중심으로 띄엄띄엄 의자가 배치됐다. 미리 광장에 나와 있던 시민이 더해져 추모객은 1000명가량으로 늘었다.

백 소장 영결식에서 추도사를 한 문정현 신부는 “앞서서 나아가셨으니 산 저희들이 따르겠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그날까지 선생님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날 가수 정태춘씨의 추모곡 ‘92년 장마, 종로에서’와 민중가수들의 ‘민중의 노래’ 합창, 시민 헌화를 끝으로 영결식을 종료했다.

이후 운구행렬은 경기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이날 장례 절차가 끝나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비롯한 국내·외 40여 개 시민분향소는 조문을 멈추고 해산할 예정이다.

고(故)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운구행렬이 19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시청을 지나고 있다.(사진=이영훈 기자)
서울광장에서 영결식을 진행한 장례위 측은 전날 정오부터 시청 앞 광장에 시민분향소를 설치하고 조문을 받았다. 서울시 측은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사용 제한하는 서울광장에 임의로 분향소를 설치한 것에 대해 무단점유에 따른 변상금을 장례위 측에 부과할 방침이다. 서울시는 코로나19 사태가 확산한 지난해 2월부터 서울광장 사용을 제한해왔다. 작년 7월 서울광장에 연 박원순 전 서울시장 분향소는 서울특별시장(葬)이었기 때문에 행정목적을 직접 수행하는 사안이며, 백 소장은 사회장으로 해당사항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한편, 백 소장은 폐렴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 15일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17일 직접 조문해 고인을 추모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빈소를 찾은 것은 2019년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복동 할머니를 조문한 이후 2년 만이다.

고인은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나 1950년대부터 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했다. 1964년에는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가했고, 1967년에 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통일문제연구소의 모태인 ‘백범사상연구소’ 설립을 시도했다. 1974년에는 유신헌법 철폐 100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옥살이했다. 1979년 ‘YMCA 위장결혼 사건’으로 고문을 당한 뒤 구속됐다. 이후 1986년에 ‘권인숙 성고문 사건 진상 폭로대회’를 주도한 혐의로 다시 옥고를 치렀다.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했다가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고, 1992년에도 다시 대선에 출마했다. 이후에는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노동문제와 통일문제 등에 힘써왔다. 백 소장은 ‘장산곶매 이야기’ 등의 저서를 낸 문필가이자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 원작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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