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득 칼럼]문 대통령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양승득 기자I 2021.01.22 06:00:00
되도록 한·일 관계를 소재로 한 칼럼은 쓰지 않으려고 했다. 오랜 기간 도쿄에 거주한 경험을 가진데다 개인적 인연도 많아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가 잘못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국민 작가인 원로 문인마저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 무조건 친일파가 된다”며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펼치는 풍토에서 오해 살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소심함이 ‘일본’이라는 두 글자를 멀리하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내 편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식의 편협한 사고가 판을 치는 세상이지만 한 번쯤은 속내를 털어놓아야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18일 신년 기자 회견 내용 중 다른 현안에 가려 큰 시선을 끌지 못했던 것 중 하나는 한·일 관계에 대한 언급이었다. 하지만 말에 담긴 무게와 파장에서 본다면 이날 한·일 관계 발언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문 대통령은 “한·일간에 풀어야 할 현안이 많다”며 “과거사는 과거사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그것대로 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한국 법원의 징용 배상 판결에 대해서도 “(일본기업 자산이)강제 집행의 방식으로 현금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외교적 해법을 찾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말했다.

2015년 한국 영화 중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묘한 타이틀의 작품이 있었지만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영화 제목의 ‘판박이’다. 대전환에 가까워서다. 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 시절의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중대한 흠결이 있어 국민 정서상 받아들일 수 없다”며 사실상 퇴짜놓은 것을 시작으로 한·일 마찰의 주요 고비마다 강경한 입장으로 일본 압박의 선봉에 섰다. 이런 기억에 비추어 볼 때 문 대통령의 발언은 뜻밖이다. 얼음장 같은 두 나라 사이에 봄기운이 돌게 할 ‘큰 틀’에서의 확실한 처방이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 취임 후 문재인 정부의 일본을 대하는 태도는 확실히 달라졌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등이 잇따라 도쿄로 건너가 스가 총리를 면담하고 문 대통령의 대화 의지를 전한 데 이어 어제 부임한 강창일 주일 대사는 일본으로 떠나기 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이 스가 총리와의 정상 회담을 원한다”고 밝혔다. 한국 법원이 주권면제원칙을 배제하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배상 판결을 내린 후 두 나라 갈등이 더 험악한 국면을 맞았지만 외교적·정치적으로는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음을 문 대통령의 기자 회견과 강 대사의 발언이 거듭 확인해 준 셈이다.

변화 이유를 현재로선 딱부러지게 알 수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부터다. 공을 넘겨 받은 일본 정부가 어떤 액션을 취할 것인가에 답이 달려 있어서다. 국가간 합의가 뭉개지고 국제관습법을 배제한 판결이 내려지는 현실을 목도한 일본 정부 내부에는 반감이 만만치 않을 게 분명하다. 한국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혹감마저 작지 않을 수 있다. 장삿꾼끼리의 흥정에서도 먼저 화를 내고 패를 까보이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는데 문재인 정부가 걸어 온 길을 뒤돌아 보면 닮은 점이 많아 이 또한 불안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두 나라 사이에 봄 기운이 찾아들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크다. 한·미·일 삼각공조를 중시하는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출범이 희소식이요, 관계 복원을 기다리는 양국민의 열망과 침묵의 응원도 큰 동력이다. 스가 총리는 “한국이 해법을 내놔야 한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두 나라 사이의 얼음장을 녹일 봄은 자연의 봄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 열쇠는 양국 정상의 통 큰 결단과 열린 마음에 있다.

때문에 스가 총리가 문 대통령에게 건넬 인사를 하루라도 빨리 들을 수 있기를 필자는 고대한다. “안뇽하시무니까. 문재인 대통룡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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