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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소확행의 슬픔

김은구 기자I 2020.10.19 06:00:00
[정덕현 문화평론가] 예능프로그램이 과거나 지금이나 지속적으로 담아내려는 건 ‘행복’이다. 다만 그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들이 달라지면서 추구하는 소재나 방향들이 달라져 왔을 뿐이다. 과거 70~80년대 압축성장 시절에 예능프로그램이 추구한 건 웃음이 대부분이었다. 바쁘게 일주일을 보내고 주말이 되어 TV 앞에 앉은 시청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깔깔 웃을 수 있는 그 시간이 가장 큰 행복이었다. MBC ‘웃으면 복이 와요’나 KBS ‘유머일번지’ 같은 콩트 코미디 그리고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 같은 버라이어티쇼가 당대의 대표적인 예능프로그램으로 기억되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90년대의 IMF를 넘어 2000년대의 장기불황으로 들어오면서 예능프로그램이 추구하는 것은 웃음만으로는 부족해졌다. 그래서 정서적인 행복감을 주는 ‘힐링’이 예능프로그램의 중요한 코드로 떠올랐고,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공감’이 중요해졌다. 물론 웃음은 여전히 지금까지도 예능의 중요한 목표지만, 너무 힘겨워진 현실은 마취적인 웃음만으로는 더 이상 채워질 수 없는 한계를 보였다. 그 빈자리로 조금씩 실질적인 정보들이 예능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예능프로그램들은 이제 실제 현실을 변화시키는 방향으로 들어오게 됐다. 그저 막연히 웃음과 재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 어려운 현실에 처한 대중에게 그 현실을 바꿔주는 판타지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 SBS가 백종원과 함께 하고 있는 ‘백종원의 골목식당’과 ‘맛남의 광장’은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막연한 웃음과 재미가 아니라 실제 골목상권을 바꾸고, 지역 특산물을 유통해준다. 그래서 방송의 수혜를 입은 그들의 진짜 행복을 시청자들과 나눈다.

MBC ‘구해줘 홈즈’는 코로나 시국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에서의 생활이 많아지면서 갖게 된 집에 대한 관심을, 특정 의뢰인의 요구에 맞는 집을 찾아주는 것으로 대리충족 시켜준다. 서울 강남에 10평 남짓한 집의 전세가가 무려 4억원씩 되는 현실 속에서, 도심을 살짝 벗어나면 100평을 훌쩍 넘기는 정원 달린 전원주택을 3억원대에 구입할 수 있다는 이 프로그램의 정보는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없는 시청자들의 판타지를 자극한다. 파일럿 프로그램만으로 논란과 화제성을 동시에 낳았던 MBC ‘돈벌래’는 이제 아예 특정 지역의 부동산 정보를 소개한다. 투기 조장을 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최근 들어 부동산에 대한 높은 관심사는 이제 집을 주거공간이 아닌 ‘투자대상’으로 다루는 예능프로그램까지 등장하게 하고 있다.

노홍철과 딘딘, 김가영 등이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실제로 주식투자를 하는 카카오TV ‘개미는 오늘도 뚠뚠’이라는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이 프로그램은 실제로 증권계좌를 개설하고 주식투자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현실적인’ 결과들을 보여준다. 돈을 벌거나 잃기도 하는 것. 방송은 이제 더 이상 그저 방송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최근 들어 예능프로그램들이 그저 콘텐츠의 차원에서 재미와 정보를 주는데 머무르지 않고 실제 현실 속으로 들어와 변화를 만들고 있다는 건 무얼 말해주고 있는 걸까. 그건 이제 방송이 일상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정도의 확실한 ‘현실성’이 아니면 공감하거나 믿어지기 어려운 현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2030세대들이 빚을 내서라도 주식과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고 있다고 한다. 도저히 월급을 받아서는 집 한 채를 사기 어려운 현실에 그런 투자만이 살 길이라는 절박함이 거기에는 드리워져 있다. 현재의 노력으로 미래의 행복을 더 이상 꿈꿀 수 없는 청춘들은 그래서 어느새 소소해도 확실한 행복만을 바라보게 됐다. 하지만 그것이 행복은 맞는 걸까. 미래가 불투명한 행복이 있기는 있는 걸까. 소확행에는 그래서 슬픔이 묻어난다.

정덕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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