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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공직사회에 다시 퍼지는 감사 포비아

김상윤 기자I 2020.10.22 06:00:00

자료 폐기해 감사 방해한 건 잘못이지만…
감사원 적극행정 기조 결국 무색해져
청와대 지시 무비판적 추종 분위기 바꿔야

최재형 감사원장이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삼청동 감사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세종=이데일리 김상윤 기자]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월성1호기 셧다운 결정에 관여했는데 이렇게 탈탈 털리고 징계까지 받으니 앞으로 누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겠습니까.”

20일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타당성에 대한 감사원 감사결과 발표를 본 한 공무원의 토로다.

올초 정세균 국무총리는 최재형 감사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공직사회의 복지부동 관행을 혁신하기위해 적극행정은 면책하고 소극 행정은 문책하겠다”고 했다. 이에 감사원은 고의나 중과실이 없으면 폭넓게 면책하는 ‘적극행정’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헛말이 됐다.

공직 사회에서는 적극적으로 정책을 추진하다가 자칫 감사에 걸려 문책 당할 가능성을 우려하는 이른바 ‘감사 포비아(공포)’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실정이다.

감사원은 월성1호기 관련 자료를 삭제를 지시하고 이를 실행한 산업통상자원부 국장과 과장에 대해서는 경징계 이상의 징계를 요구했다. 아울러 문책대상자들의 자료삭제 및 업무관련 비위행위 등을 수사과기관이 추가로 조사할 수 있도록 수사참고자료를 송부할 예정이다.

감사원법에 따르면, 감사원은 감사에 필요하면 증명서, 변명서, 그 밖의 관계 문서 등의 제출을 요구할 수 있고, 정당한 사유 없이 자료의 제출을 게을리한 공무원에 대해 그 소속 장관에게 징계를 요구할 수 있다. 감사원 조사를 방해한 혐의에 대해서는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관가에서는 현 정부가 국정과제로 삼은 정책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불가피했던 사안이라고 안타까워하는 분위기다.

정부 한 관계자는 “자료 폐기 자체는 문제로 볼 수밖에 없지만, 최종 결재 문서도 아닌 정책 결정 중간 과정에서 만든 문서였던 것으로 안다”면서 “결국 현 정부의 핵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한 공무원만 징계를 당하게 됐다”고 말했다.

산업부에서는 이례적으로 1년여간의 강도높은 감사원 감사에 내부 사기가 상당히 저하된 상황이다. 원전산업국은 기피 부서가 된지 오래다. 산업부 관계자는 “감사가 시작되면서 원전산업국을 거친 직원을 비롯해 현 직원도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면서 “이미 직원들 사이에서는 원전산업국에 인사 발령만 내지 말아달라고 요청할 정도다”고 토로했다.

관료의 자율 결정을 보다 존중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나 정치권에서 무리한 요구가 내려왔을 때 무비판적으로 추종하기보다는 소신있게 정책을 펼 수 있도록 공직사회를 독려해야한다는 얘기다.

전직 고위관료는 “과거처럼 청와대 결정을 무조건 실행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면서 “법과 원칙에 따라 일을 처리하되, 문제가 될 경우에는 실행하지 않더라도 문책하지 않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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