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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훈길의뒷담화]전국민중 12%는 못받는 누더기 재난지원금

최훈길 기자I 2021.07.24 09:00:00

정치적 '중재안'이지만 형평성 논란 불가피
선별지원 잣대로 쓰는 건보료는 '양날의 칼'
건물주 가족 금수저 받고 흙수저는 못 받아
정치 공방에 실시간 소득파악 제도개선 뒷전

※모든 정책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세종관가 이슈나 정책 논의 과정의 뒷이야기를 추적해 전합니다.

[세종=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정치적으로는 중재안이지만, 정책적으로는 누더기입니다.”

한 전문가는 국회를 통과한 2차 추가경정예산(추경)안을 이렇게 촌평했습니다. 앞서 국회는 24일 새벽에 정부안보다 1조 9000억원 증액한 34조 9000억원 규모의 추경안을 처리했습니다. 추경 규모는 지난해 3차 추경(35조 1000억원) 다음으로 역대 두 번째로 큰 수준입니다. 최대 쟁점이었던 코로나 상생 국민지원금(긴급재난지원금)은 소득 하위 88% 가구에 1인당 25만원씩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지급 시점·방식은 오는 26일 기재부, 보건복지부, 행정안전부, 중소벤처기업부 브리핑을 통해 공표됩니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적절히 주고받은 ‘중재안’입니다. 지급 대상은 더불어민주당이 주장한 100% 전국민 지원과 기획재정부가 고수한 80% 선별지원의 ‘중간값’ 수준입니다. 민주당은 증액을 얻어냈고, 기재부는 백지화까지 검토됐던 카드 캐시백, 국채 상환(2조원)을 지켰습니다. 국민의힘은 소상공인 지원금 증액을 관철시켰습니다. 당초 데드라인(23일)을 넘겼지만 지난 2일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된지 22일 만에 비교적 신속하게 처리됐습니다.

건보료 양날의 칼, 신속하지만 형평성 논란 불가피

하지만 ‘누더기 재난지원금’이란 지적도 피하기 힘들게 됐습니다. 당정청 협의가 무색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지난 1일 정부가 당정청 협의를 거쳐 발표한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은 80%였습니다. 하지만 추경안이 국회에 제출되자 민주당은 ‘전국민 100%’ 지원으로 입장을 바꿨습니다. 이 과정에서 홍남기 경제부총리를 놓고 패싱 논란, 백기투항, 사의 표명설까지 돌았습니다. 지급 대상을 놓고 80%, 84%, 90%, 100% 얘기가 나오다가 결국 어정쩡한 88%로 결정됐습니다.

문제는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소득 하위 88%를 제대로 선별해 낼 수 있는지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득 하위 88% 대상에 선별 지원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정부는 건보료를 부과 기준을 활용하면 88%까지 선별하는 것이 행정적으로 큰 무리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90%까지 주기로 했다가 철회한 ‘제2 아동수당’ 논란이 우려됩니다. 형평성을 놓고 소모적 논쟁이 불거지고, 정부에 민원이 쇄도할 수 있어서입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사진=연합뉴스)
건보료는 ‘양날의 칼’입니다. 사실상 전국민이 가입돼 있어 다른 잣대보다 선별하기가 상대적으로 쉽고 신속하게 지급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건보료가 만능키는 아닙니다. 단돈 얼마 차이로 소득 하위 88%는 지원금을 받고 89%는 못받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건물주 아들은 받고 흙수저 1인가구나 맞벌이는 못 받는 사태도 우려됩니다.

일례로 지방에서 상경해 서울의 전셋방에서 살면서 연봉 5000만원 넘게 받는 ‘흙수저’ 1인 가구는 이번 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소유한 건물에서 임대료를 내지 않고 가끔 출근하면서 월 400만원을 버는 ‘금수저’ 1인 가구는 지원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는 건보료 체계의 한계 때문입니다. 건보료 직장가입자는 부동산, 금융 등 자산 규모가 보험료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자영업 등 지역가입자에서도 반발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직장가입자는 올해 소득을 기준으로 재난지원금 지급 커트라인을 책정합니다. 하지만 지역가입자의 경우에는 2019년분입니다. 이는 올해 책정된 건보료가 2019년 종합소득신고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역가입자의 경우에는 코로나19로 작년부터 소득이 줄어 피해를 입었는데, 이번 지원금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습니다. 제외된 자영업자가 대상에 포함되려면 정부에 직접 ‘이의신청’을 해야 합니다.

물론 정부도 이같은 우려를 모르는 건 아닙니다. 정부는 재산세 과표 9억원 이상(주택 공시가격 약 15억원, 시가 약 21억원) 또는 금융소득 연 2000만원 이상 고액자산가를 제외하는 방안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앞서 예를 든 ‘건물주 금수저 자녀’는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같은 가구에 살면서도 본인 명의로 이같은 재산을 보유하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별지원의 한계입니다.

“근본적 대책은 실시간 소득 파악 시스템”

정부 일각에선 상대적으로 고액 연봉을 받는 12% 고소득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됩니다. 코로나 상황에서 극심한 피해를 보는 자영업자들보다 상황이 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년에 소득 하위 50% 이하에 지급하던 것과 이번에 88%에 지급하는 것은 상황이 다릅니다. 주변에 10명 중 9명이 받는데 못받는 상황만큼 억울한 일도 없습니다. 세금은 더 많이 냈는데 왜 지원 대상에서 차별하냐는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이번 재난지원금 논란에서 아쉬운 대목도 많습니다. 지급 대상을 놓고 논란만 벌이다 정작 중요한 제도개선 논의는 뒷전이 됐습니다. IT 선진국인 한국에서, 작년에 코로나 상황을 적절하게 대응한 한국에서 여전히 피해 수준에 맞는 맞춤형 지원을 못하고 있습니다. 실시간 소득 파악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피해 보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재난지원금 논란에도 실시간 소득 파악 시스템은 2025년에야 갖춰집니다. 정부가 로드맵을 앞당기지 못했고, 자영업자 등 신고자들이 소득 신고를 회피하는 경향도 있기 때문입니다.

최현수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사회보장재정·정책연구실장은 “근본적인 대책은 2025년으로 예고된 국세청의 실시간 소득파악시스템을 하루라도 빨리 구축하는 것”이라며 “이 시스템을 구축하면 자영업을 비롯한 피해 산정이 가능해 최대한 정확하고 빠르게 재정 지원이 가능해지는 만큼 이번 재난지원금 논란을 계기로 소득파악시스템 개선 속도를 끌어 올렸으면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재난지원금 지급 논쟁 이상으로 제도개선 논의가 탄력을 받길 기대합니다.

국회를 통과한 2차 추경안. (자료=기획재정부)
재난지원금은 정부안보다 6000억원 증액돼 총 11조원(국비 8조 6000억원, 지방비 2조 4000억원)으로 편성됐다. 맞벌이·1인 가구 등 당초 계획(소득 하위 80%)보다 178만 가구가 추가된 소득 하위 88% 가구에 1인당 25만원씩 지급된다. 소득 하위 88%는 2034만 가구(4472만명) 규모다. 전국민 지원을 주장한 여당과 소득 하위 80%를 요구한 기획재정부, 전국민 지원에 신중한 야당이 합의한 결과다. (자료=기획재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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