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이달의판결]'성폭행출산' 숨긴 이주여성 혼인무효 승소

전재욱 기자I 2016.05.16 06:30:00

1·2심 "'성폭행 출산사실' 숨기면 혼인무효 사유"
대법, 파기환송…"성폭행 피해 경위 비춰 고지의무없어"
서울변회 "출산경력 일괄 고지 의무없다 기준제시 의미"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베트남 국적의 A(26·여)씨는 국제결혼중개업소에서 만난 한국인 B(41)씨와 2012년 4월 혼인신고를 하고 가정을 꾸렸다. 결혼생활은 A씨가 2013년 1월 시아버지한테서 두 차례 강간을 당하면서 파탄이 났다. 시아버지는 B씨의 계부였다. A씨는 시아버지를 고소하고 집을 나가버렸다.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죄로 기소된 B씨의 계부는 1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강간사건 항소심이 진행 중이던 2013년 8월 B씨는 A씨를 상대로 혼인무효 소송을 냈다. 재판과정에서 A씨가 베트남에서 아이를 낳은 사실을 감추고 결혼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1심은 A씨의 행위가 민법에서 정한 혼인취소 사유인 ‘사기로 인하여 혼인의 의사표시를 한 때’에 해당한다며 B씨의 손을 들어줬다.

A씨는 항소심에서 출산 배경을 털어놨다. 베트남에는 약탈혼 풍습이 남아 있고, 자신은 13살 되던 무렵 납치돼 혼인했으며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아이는 낳자마자 남자가 데려가 키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항소심은 “혼인의사를 결정하는 데 출산경력이 차지하는 중대성에 비춰 보면 A씨가 미성년자로서 납치·강간을 당해 출산을 했다고 하더라도 고지 의무를 면할 수 없다”며 혼인을 취소하라는 1심과 동일한 결정을 내렸다. 아울러 “A씨는 B씨를 속이고 결혼했으므로 위자료 300만원을 지급하라”고 했다. A씨가 시아버지한테 강간당한 데 대해 청구한 위자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상고심 판단은 달랐다. 지난 2월 대법원 3부(주심 김신 대법관)는 B씨가 A씨를 상대로 낸 혼인무효 소송 상고심(2015므654)에서 B씨의 손을 들어준 원심을 깨고 사건을 전주지법으로 내려보냈다.

재판부는 “아동 성폭력범죄 피해로 임신과 출산을 하고 상당 기간 자녀와 관계가 단절돼 양육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개인의 내밀한 영역이고 사생활 비밀의 본질에 해당한다”며 “이를 고지하지 않는 것이 신의성실의무에 비춰 비난받을 정도는 아니다”고 설명했다.

이어 “A씨는 아동 성폭력 범죄를 당해 임신·출산했고 자녀와 관계가 단절돼 상당기간 양육을 하지 않았다”며 “이러한 출산 경력을 단순히 고지하지 않은 것을 혼인취소사유에 해당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서울지방변호사회와 이데일리가 뽑은 이달의 판결’ 선정 자문위원인 정혜선 변호사(37·사법연수원 36기)는 “대법원이 출산경력에 일률적인 고지 의무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하고 혼인취소사유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기준을 제시한 판결”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다만 “아동 성폭력 범죄만 고지 의무를 면제하는 것처럼 해석될 여지가 있다”며 “성인 성폭력 피해자가 임신·출산 경험을 알려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없어 아쉽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