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꽉 막힌 한·일관계…문학으로 소통하다

김성곤 기자I 2015.04.30 06:41:00

신경림·다나카와 슌타로 '시 낭송 콘서트'
세월호 아픔 어루만지며 공감대
日 과거사 반성 이어져
오에 겐자부로·무라카미 하루키 "정부가 사죄해야"
윤동주·고은 작품 日서 인기몰이
하루키 열풍 이어 국내 작가들의 일본 진출도 활발

한국시단의 거목 신경림(오른쪽) 시인과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다니카와 슌타로(84) 시인은 최근 대시·대담·대표시·에세이를 묶은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를 출간했다(사진=위즈덤하우스).


[이데일리 김성곤 기자] 독도·위안부 등 민감한 정치사회적 이슈에도 한국과 일본 양국 문인들의 활발한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한·일관계는 국교 정상화 50주년에도 여전히 교착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 특히 야스쿠니 신사 참배, 위안부 부정, 독도영유권 주장, 군사대국화 등 일본 아베 정부의 우경화 흐름이 가속화되면서 양국관계의 해빙기는 요원하다. 미묘한 균열은 문학에서 비롯되고 있다. 한·일 문인들이 상호소통에 나서고 있는 것. 역사인식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지만 문학의 힘이 서서히 그 벽을 허물 조짐이다.

▲신경림·다니카와 슌타로 시로 허문 한·일 경계

“남쪽 바다에서 들려오는 비통한 소식/ 몇 백 명 아이들의 깊은 물 속/ 배에 갇혀 나오지 못한다는/ 온 나라가 눈물과 분노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도 나는/ 고작 떨어져 깔린 꽃잎들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신경림). “숨 쉴 식(息) 자는 스스로 자(自) 자와 마음 심(心) 자/ 일본어 ‘이키’(息·숨)는 ‘이키루’(生きる·살다)와 같은 음/ 소리 내지 못하는 말하지 못하는 숨이 막히는 괴로움을/ 상상력으로조차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괴로움/ 시 쓸 여지도 없다”(다니카와 슌타로).

지난 23일 서울 구로구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 ‘세계 책의 날’을 기념해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와 구로아트밸리가 공동기획한 ‘시 낭송 콘서트’에 한국시단의 거목 신경림(80) 시인과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다니카와 슌타로(84) 시인이 참석했다. 두 시인은 최근 대시·대담·대표시·에세이를 묶은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를 출간했다. 그간 한·일 문인교류는 있었지만 서로의 대화를 바탕으로 한 대시집을 양국 공동으로 낸 건 전례가 없던 일. 정치와 달리 문학은 부드러웠다. 시인들은 이날 세월호의 아픔을 어루만지며 양국의 소통 부재를 녹여냈다. 박수와 웃음이 어우러지면서 ‘한·일’이란 경계를 지웠다.

장사선 홍익대 명예교수는 “신경림과 다니카와, 두 시인의 대시집 출간은 한국문단사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일로 양국 문학활동에 참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막혀 있는 한·일 정치관계를 푸는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시단의 거목 신경림(왼쪽 세 번째) 시인과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다니카와 슌타로(두번째) 시인이 지난 23일 서울 구로동 구로아트벨리 예술국장에서 ‘모두 별이 되어 내 몸에 들어왔다’ 출간을 기념하는 시 낭송 콘서트에 참석해 청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사진=위즈덤하우스).


▲과거사 반성하는 오에·무라카미…한국 작가군 日 진출 활발

한·일 문인들의 공동 출판작업은 물론 일본 주요 문인들의 과거사 반성은 한·일관계를 보다 부드럽게 만든다. 한국 작가들의 일본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우선 위즈덤하우스는 신경림·다니카와에 이어 일본 구온출판사와 공동으로 ‘한·일 작가들의 대화’를 매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시인, 소설가, 드라마작가 등 양국의 스타급 작가를 각각 1명씩 섭외, 공동으로 책을 내면서 상호교류를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한수미 위즈덤하우스 편집장은 “딱딱한 거대담론에서 벗어나 한·일 독자가 이웃나라와 감정을 교류하며 서로의 문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면서 “시나 소설 등 한국문학을 일본에 소개하는 역할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와 한국에서 폭넓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과거사 발언도 화제다. 오에는 지난 3월 방한한 자리에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전쟁 때 위안부가 존재했고 식민지여성까지 동원했다”며 “일본이 국가로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라카미도 최근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사죄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과거 일본의 침략 사실을 인정하고 상대국이 ‘이제 됐다’고 할 때까지 사죄해야 한다”고 밝혔다. 오에는 한국문학에 대한 애정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한국 현대소설을 애독하는데 높이 평가하는 작가는 황석영”이라며 “개인의 내면을 그리면서도 사회적으로 이어진 인간을 묘사한다. 황석영 문체는 장래 문학사에서 커다란 표지로 남을 것”이라고 칭찬했다.

한국 문학의 일본 진출도 활발하다. 국내의 하루키 열풍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일본 출판시장에서 보폭을 넓혀가고 있는 것. ‘서시’의 윤동주는 일본에서 크고 작은 읽기 모임이 열릴 정도로 사랑받는 작가다. 고은 시인의 경우 일본에서 특강을 하면 한국보다 많이 몰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다. 류시화 시인의 시집은 일본 대학생들이 선물로 이용할 정도다. 최근에는 공지영, 신경숙, 최영미, 안도현 등 한국의 유명 작가들도 적잖게 소개됐다.

일본 와세다대에서 10여년간 객원교수를 지낸 김응교 숙명여대 교양교육원 교수는 “10여년 전 일본 서점의 한국소설 코너에 ‘겨울연가’나 ‘대장금’ 등 한류 드라마를 소재로 한 소설책이 주로 꽂혀 있는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라면서 “과거 한국문학을 번역하는 일본 출판사는 마이너였는데 최근 메이저급이 뛰어들고 있다. 아직 한국어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지만 고은 시인과 일본의 요시마스 고오조 시인이 시 편지를 주고받은 내용을 묶은 책이 후지와라 서점에서 출간됐다”고 밝혔다.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왼쪽)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 “일본이 국가로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13일 서울 동교동 한 카페에서 열린 소설 ‘익사’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오에(사진=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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