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벤스가 굴러다니던 '중세 아트마켓' 스케일[이윤희의 아트in스페이스]<17>

오현주 기자I 2021.12.31 03:30:00

▲프랑켄 2세, 반 헤흐트, 오즈번이 본 '화랑'
해마박제·미술품 섞인 만물상 같은 개인 컬렉션
루벤스 등 세기명작 숱하게 걸려 있는 대형화랑
그림 평가받는 젊은 여성화가 그린 작은 화랑도
화랑 풍경들에서 엿볼 수 있는 미술시장 양극화

빌렘 반 헤흐트가 1628년 그린 ‘코르넬리스 반 데어 기스트의 화랑’. 반 헤흐트는 화랑과 소장품을 그린 그림으로 가장 잘 알려진 플랑드르 화가. 1628년부터 코르넬리스 반 데어 기스트의 화랑이 소유한 컬렉션의 큐레이터로도 일했는데, 작품은 화랑을 홍보하는 그림을 제작했던 그 시기에 그렸다. 가로 120㎝ 남짓한 화면에 정교한 묘사가 감탄스러운 작품 속에는 지금껏 전해지는 수많은 ‘진짜 명화’에 더해 스페인의 인판타 이사벨 클라라,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대공, 플랑드르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바사 왕자 등 실존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나무패널에 유채, 99×129.5㎝, 벨기에 안트베르펜 루벤스하우스 소장.


200여년 전 소설 ‘오만과 편견’이 탄생한 곳은 낡은 책상이었답니다. 종이 몇 장과 잉크병, 깃대펜이 전부인 그곳이 바로 영국작가 제인 오스틴의 작업실이었던 셈입니다. 장서가 그림처럼 꽂힌 책장, 큼직한 책상이 근사한 ‘서재’란 공간은 남성 작가만 차지할 수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서재뿐인가요. 화가의 공간이던 ‘아뜰리에’도 그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카페’와 ‘술집’ ‘광장’도, 한 가정집의 ‘부엌’과 ‘식당’ ‘침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해 있던 공간이지만, 그곳이 모든 이들에게 늘 공평했던 것은 아니었던 겁니다. 오랜 시간 미술관을 일터로 삼아온 이윤희 큐레이터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때론 객관적 기록으로, 때론 상징을 담아, 때론 비틀린 풍자를 숨겨낸 ‘그림으로 읽는 공간이야기’ ‘그림으로 읽는 사람이야기’입니다. 주말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이윤희 큐레이터·미술평론가] “그림을 좀 사고 싶은데, 뭘 사는 게 좋을지 추천 좀 해줘. 네가 전문가니까. 한 2000만∼3000만원 정도?” 도통 미술에는 관심이 없던 친구가 밑도 끝도 없이 작품 추천을 부탁했다. 몇몇 작가이름도 거론했는데, 최근 시장에서 인기가 있긴 했지만 전혀 다른 경향의 작가이름들이 한꺼번에 나오는지라, 그것이 친구의 취향에 부합하는지, 또 그들의 작품이 길게 볼 때 미술사적 가치가 있는지 등을 이야기하려면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들어보니 근래 화랑·페어 몇 군데를 들러봤고 옥션도 눈여겨보고 있다는데, 요즘 미술시장이 활기를 띠는 과정에서 가장 놀라운 일이라면, 그 친구의 부탁이었다.

미술시장은 부동산시장과 비슷하긴 하지만 더 까다로운 영역이다. 환금성이 있고, 시간이 가면 가격이 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어떤 작품은 틀림없이 오를 것이란 점에서는 부동산과 비슷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것이 취미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확고한 취향을 가진 컬렉터가 어디 있으랴. 자신의 눈으로 보고 또 보면 눈에 선해 꼭 내 소유로 만들고 싶은 작품이 생기게 되고, 그것을 시발점으로 해 더 많은 작가와 작품을 파 보면 그것이 나만의 컬렉션이 되는 것이다.

수장고를 따로 가진, 그러니까 온도 20도 습도 50% 정도를 유지하는 전문 보관실을 가진 컬렉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집에 걸어놓거나 보관하는 정도일 텐데, 이는 개인 컬렉션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플랑드르의 화가 프란스 프랑켄 2세(1581∼1642)의 ‘경탄의 저장고’(1636)는 작은 벽과 테이블을 이용해 수집품을 빽빽이 늘어놓은 공간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가진 모든 보물…컬렉터의 취향을 내걸다

테이블 왼쪽부터 보자면 작은 테라코타 보석함에 든 장신구류를 비롯해 각종 조개류와 동전, 도기, 또 세워놓을 수 있는 작은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다. 벽에는 성모자에 대한 동방박사의 경배 등 여러 풍경화와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림 사이사이에 핀으로 박아 건 진기한 생물체가 보이는 것이다. 해마나 이빨이 튀어나온 물고기의 박제 등등. 이 컬렉터는 비단 미술만이 아니라 자연의 신기한 사물에도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취향이 분화해 지금은 동전수집가, 자연사물 수집가, 미술품 수집가가 서로 다른 영역으로 존재하지만, 이 컬렉터는 이 모두에 조금씩이라도 관심을 뒀던 것이다.

오른쪽 아치형 거울에 비친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그 컬렉터일 것이다. 거울 속에는 선반 위로 조각작품이 더 전시돼 있으며, 컬렉션 주인은 자신의 모든 보물을 친구들에게 하나하나 소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가 모두 다른 듯 보이는 이 그림들은 어디서 구한 것일까. 바로 화랑이다.

프란스 프랑켄 2세의 ‘경탄의 저장고’(1636). 플랑드르 미술에 새로운 주제를 도입한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꼽히는 프랑켄 2세가 들여다본 어느 미술품 소장자의 컬렉션. 예술과 예술작품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1620년대 이후의 ‘갤러리 그림’들에는 넓은 방에 들인 과학도구나 자연표본과 함께 묘사한 미술품이 등장한다. 간혹 작업 중인 미술작품 또는 컬렉터의 초상화가 들어가기도 했다. 나무패널에 유채, 86.5×120㎝,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박물관 소장.


상업이 발달했던 17세기 안트베르펜(플랑드르 지방 벨기에의 도시)에는 번듯한 화랑들이 있었다. 화가와 컬렉터 사이에서 그림을 중개하는, 당시의 화랑 풍경은 빌렘 반 헤흐트(1593∼1637)의 그림 ‘코르넬리스 반 데어 기스트의 갤러리’(1628)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현재 유럽 유수의 미술관의 주요 소장품인 작품들이 벽과 바닥에 아무렇지도 않게 놓여 있으며, 화랑주인뿐 아니라 대가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와 안토니 반 다이크까지 그려져 있는데, 이 가슴 떨리게 하는 화가들이 이 화랑에서 그림을 팔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현재 유럽 유수 미술관 명작들이 대충 놓인 화랑

그림을 구매하러 온 이들은 역시 자리에 앉아 화랑주인의 설명을 듣고 있다. 화면의 왼쪽에는 잘 차려입은 여성과 남성,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등에서 왔을 귀빈들이 앉아서 쿠엔틴 데 마시스의 ‘성모자상’을 손으로 가리키는 화랑주인의 설명을 경청하는 중이다. 놀라운 것은 그 그림의 주변에 있는 이들인데, 의자에 앉은 남성 바로 뒤에서 몸을 굽혀 설명을 돕고 있는 것 같은 갈색 머리의 인물이 루벤스이고, 화랑주인의 뒤에서 검은 옷을 입고 손짓을 하며 말을 하고 있는 인물이 반 다이크인 것이다. 루벤스의 바로 옆에는 후에 폴란드의 왕이 될 인물도 화랑을 둘러보고 있다. 결국 이곳은 동네시장이 아니라 유럽 전체와 거래를 트고 있던 국제적인 화랑이란 것을 알 수 있다.

화랑 공간을 한 번 크게 둘러보자. 화면의 왼쪽으로 난 창밖에는 배가 한 척 떠 있는 풍경이 보여, 이 공간이 항구인 안트베르펜의 바다가 보이는 곳에 위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높은 천장에까지 닿아 있는 벽에는, 지금 각국 미술관에 가서야 볼 수 있는 세기의 작품들이 걸려 있는데, 루벤스의 작품이 많이 보이고 얀 반 아이크, 데 마시스를 비롯해 당시 플랑드르 거장들의 그림이 빼곡하다. 그중 검은 모자와 검은 망토를 두른 이의 초상은 독일의 거장 뒤러의 초상화인데, 지금은 유실해 원본을 볼 수 없고 모사한 판화로만 전해지지만 화랑에 걸린 모습으로써 원본작품이 틀림없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빌렘 반 헤흐트의 ‘코르넬리스 반 데어 기스트의 화랑’(1628) 부분을 클로즈업했다. 화랑을 방문한 VIP와 화가의 면면이 보인다. 왼쪽부터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대공, 플랑드르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 폴란드의 브와디스와프 바사 왕자.


화면 가운데 테이블에서도 고객들은 작은 조각상을 앞에 놓고 혹은 작은 그림을 손에 든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오른쪽에는 바닥에 놓인 그림을 자세히 보기 위해 무릎을 꿇은 사람, 더 오른쪽으로는 지구본을 구경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보인다. 사실 이들이 한꺼번에 화랑을 방문해 반 헤흐트가 그림을 완성할 때가지 기다려 줬을 리 만무할 테니, 반 헤흐트는 다녀간 이들의 초상화를 모아모아 이 그림을 완성했을 것이다.

예컨대 반 다이크의 초상은 현재 영국 왕가의 컬렉션이 된 루벤스가 그린 초상을 모사해 ‘그림 속 인물’로 만든 것이고, 그 외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초상 역시 각각의 초상화를 모사한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합성그림’을 그렸던 반 헤흐트는 이 화랑에 고용됐던 이른 시기의 큐레이터이자 화가로서, 화랑주인의 의뢰로 이 공간이 이렇게 대단한 곳이었음을 알리는 그림을 여러 점 남겼다.

난감한 얼굴의 무명화가, 훗날 유럽 전역에 이름 날려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영국 19세기 어느 작은 화랑으로 가보자. 예나 지금이나 미술계에는 대단한 거장의 그림을 취급하는 화랑이 있는 반면 신진작가의 그림을 평가하고 시장에 내놓는 화랑도 있다. 젊은 작가들은 화랑주인의 안목에 기대 좋은 기회를 얻기도 하고 거절당하는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여성화가 에밀리 메리 오즈번(1828∼1925)의 ‘이름도 없고 친구도 없는’(1857)에는 젊은 여성화가가 자신의 그림을 들고와 화랑주인에게 선보이며 평가를 기다리는 모습이 담겨 있다. 한눈에 보기에도 화랑은 그다지 큰 규모가 아니다.

에밀리 메리 오즈번의 ‘이름도 없고 친구도 없는’(1857). 영국 빅토리아 시대 여성화가였던 오즈번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듯 그린 작품으로, 모티프는 소설 ‘자제’(Self-Control)에서 따왔다고 전해진다. 고통에 처한 여성과 아이를 주제로 한 작품을 많이 남긴 오즈번은 실제로 재능과 달리 무명화가로 살아야 했다는데, 훗날 이 그림을 통해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렸고, 남긴 작품 중 가장 탁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캔버스에 유채, 82.5×103.8㎝, 영국 런던 테이트미술관 소장.


화랑의 쇼윈도에는 여러 장의 그림이 붙어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화랑 안쪽에는 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발레리나를 그린 그림 한 점을 손에 들고 있다. 그런데 이 구매자들의 시선은 영 다르다. 손에 든 그림이 아닌 그림을 팔러 온 여성화가에 꽂혀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전형적으로 훔쳐보는 것 같은 느물느물함까지 담고 있지 않은가. 그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가의 치맛단에는 어린 동생과 함께 빗길을 오래 걸어온 듯 흙이 묻어 있고, 옆에 세워둔 우산에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턱에 손가락을 대고 눈을 내리깔고 있는 화상은 과연 이 그림을 사 줄 것인가. 대답을 기다리는 화가는 망토의 실자락을 부여잡고 애를 태우는 모습이다. 밥벌이로 그림을 선택한 화가의 태도는 이보다 당당하고 허세라도 있어야 할 듯하지만, 이 정직한 화가는 그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심정인가 보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이토록 난감한 얼굴의 여성화가가 비록 여기서는 거절당했다 하더라도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됐을지 말이다.

△이윤희 큐레이터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해외여행 자유화 덕분에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누구나 들렀던 어느 미술관에서 뜻밖에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그 수많은 작품을 설명하는 언어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도 함께였다. 이화여대에서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론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를 시작으로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치며 오래전 그 렘브란트의 감동을 현장으로 옮겼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 ‘여성의 눈으로 보는 미술 키워드’의 출간을 앞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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