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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 비행기 추락사...中공산당 2인자 의문의 죽음 [그해 오늘]

김혜선 기자I 2023.09.12 00:00:10

프리고진 죽음과 닮은꼴, 독재정권의 반복된 비극
문화대혁명 주도한 린뱌오, 공산당 2인자 됐지만
마오쩌둥 의심에 몰락...소련 망명중 의문의 비행기 추락

[이데일리 김혜선 기자] 1971년 9월 12일 밤. 중국 공산당의 2인자이자 당시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칭송받던 린뱌오(林彪)는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급히 방탄 리무진에 올랐다. 목적지는 소련이었다. 린뱌오가 탄 차량은 검문초소를 무력 돌파해 베이다이허(北戴河)의 산하이관(山海關) 공항에 도착했고, 이들은 미리 준비한 제트기 트라이던트1E 256호에 급히 탑승했다. 린뱌오가 탄 제트기는 9월 13일 0시 32분 이륙했고, 비행 2시간여 만에 몽골 고비사막에서 추락해 전원 사망했다.

마오쩌둥(오른쪽)과 린뱌오(왼쪽). (사진=국가기록원)
린뱌오의 죽음은 최근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 대항해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예브게니 프리고진의 것과 비슷하다. 린뱌오 역시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최측근이었고, 중국 공산당의 국방부장이었다. 차이점은 프리고진이 용병대 수장이었다면 린뱌오는 정규군을 이끌었다는 것과 린뱌오의 쿠데타는 실행에 옮기지 않아 ‘쿠데타 설’로 남았다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은 2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약 10개월간 숨기다가 ‘린뱌오가 마오쩌둥 암살 등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가 발각되자 소련으로 도주하려 했지만 1971년 9월 13일 비행기가 몽골에 추락해 린뱌오와 그의 가족, 가담자 등 탑승자 9명이 전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린뱌오도 걸은 ‘2인자 말로’의 길

린뱌오는 공산당 무장조직인 중국공농홍군(홍군) 출신으로 유능한 전술가였다. 중일전쟁 당시 연전연패하던 중국이 최초로 승리했던 핑싱관(平型?) 전투도 린뱌오가 이끌었고, 뒤이어 일어난 국공 내전에서도 장제스 국민당군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정치적 셈에도 능했다. 린뱌오는 전 국방부장인 펑더화이가 1959년 7월 루산(慮山)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한 이후 숙청 움직임이 일자 나서서 펑더화이를 비판하는 저격수를 자처했다. 펑더화이가 숙청된 이후 린뱌오가 국방장관직에 오르게 됐고, 1969년 4월 제9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서 후계자로 린뱌오의 이름이 기입되는 등 정치적 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린뱌오의 별명은 ‘마오의 충실한 전우’로, 문화대혁명 시기 “마오는 천재요 주석의 말씀은 다 옳다”며 마오쩌둥을 신격화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마음에 의심이 싹트며 린뱌오의 입지도 흔들렸다. 린뱌오는 서둘러 국가주석이 되기 위해 당을 분열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위기감을 느낀 그는 국가주석과 당 주석은 마오가 겸임해야 하며 자신은 부주석 자리에도 앉지 않겠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마오쩌둥의 의심이 사그러들지않자 린뱌오는 1971년 암살 계획을 세웠다가 당시 총리였던 저우언라이에 발각되면서 실패했다.

그렇게 린뱌오 역시 2인자의 말로를 걸었다. 린뱌오의 죽음 이후 공산당 부주석에 오른 이는 왕훙원으로, 이후 왕훙원은 ‘린뱌오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하자’는 기괴한 ‘비림비공’ 운동을 전개해간다.

린뱌오가 탄 제트기의 추락 원인은 최근 몽골 정보당국 보고서가 공개되며 조종사의 실수였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여전히 그의 죽음에는 의문점이 많다. 마오쩌둥은 린뱌오의 탈출 소식에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남겼다고 한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면 막을 수 없고, 홀어머니가 시집을 간다고 하면 막을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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