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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담배장사로 탈옥 준비한 무기수…비극적 최후[그해 오늘]

한광범 기자I 2022.12.27 00:03:00

1990년 전주교도소 탈옥사건…10대 탈주범만 생존
무기수 복역중 교도관 비호 속 수개월 간 탈옥준비
경찰관 권총 빼앗아…포위망 좁혀오자 극단 선택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1990년 12월 27일,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 4시30분 전주교도소에서 세 명의 남성들이 탈옥에 성공했다.

이들은 몰래 반입한 쇠톱으로 수감 중이던 수형실 화장실 창문에 있던 쇠창살 2개를 자른 후 교도소 선반을 잘라 만든 사다리를 이용해 수형동을 빠져나갔다. 수형동에서 20미터 가량 떨어진 교도소 외벽까지 몰래 이동한 이들은 사다리를 타고 4.5미터 높이의 외벽까지 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수형동을 나와 철조망에 처진 외벽까지 통과하는 동안 교도소 감시망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심지어 감시초소에 근무자가 있었지만 탈옥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4개월여전부터 준비한 탈옥이었지만 교도소는 이들이 탈옥한 후 3시간가량 지난 오전 7시20분께 아침점호 시간이 돼서야 이들의 탈옥 사실을 알아챘다.

박봉석 일당의 탈옥 관련 기사를 실은 1990년 12월28일자 동아일보 기사.
탈옥한 이들은 박봉선(당시 30세), 신광재(당시 21세), 김모군(당시 17세)였다. 박봉선은 7년 전인 1983년 처남색을 잔혹하게 살해한 후 시체를 유기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무기수였다

신광재는 1989년 5월 광주의 한 가정집에 침입했다가 발각되자 집주인을 살해한 혐의(강도살인)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김군은 1990년 5월 술집에서 폭력을 행사해 징역 장기 10월, 단기 8월형을 선고받은 폭력사범이었다.

탈옥 전 교도관 도움으로 사복 밀반입

탈옥 당시 이들의 옷차림은 수의가 아닌 사복이었다. 수감 당시 박봉선이 교도관 도움으로 외부에서 몰래 반입해 수형실에 몰래 보관하던 옷이었다. 교도소 탈출에 성공한 이들은 전주 도심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달아났다. 그리고 전주 도심에서 다시 만나 한 야산에 잠시 숨어있다가 옷을 새로 사입은 후 흉기를 구입했다.

이들은 택시를 타고 이리역(현 익산역) 인근에 도착해 인근 카바레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음주 후 가게 인근에서 신문에 자신들의 탈옥 사실이 보도된 것을 알고 이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택시를 잡아탄 후 택시기사를 위협해 현금과 신분증 등을 빼앗은 후 차량을 몰고 대전으로 이동했다.

같은 날 오전 7시10분께 터미널 부근 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던 이들에게 경찰관 2명이 접근해 검문을 시도했다. 그러자 이들은 들고 온 흉기로 경찰관을 위협해 권총을 빼앗은 후 다른 경찰관에게 흉기를 휘둘러 중상을 입혔다.

이들은 곧바로 식당에서 나와 인근 도로에서 승합차를 탈취해 이를 몰고 신탄진까지 달아났다. 오전 8시30분께 이들은 신탄진 한 도로에서 경찰의 검문을 확인한 후 달아났다.

경찰이 공포탄을 쏘며 이들을 추격했지만 이들은 빼앗은 총기로 응사했다. 이들은 현장 근처에 있던 또 다른 승합차를 훔쳐 달아나다가 오전 8시50분께 대청댐 인근에서 경찰 검문소가 보이자 차량을 버린 후 야산으로 도망갔다.

경찰의 포위망 속에서도 야산에서 2시간 넘게 숨어있던 이들은 오전 11시께 몰래 산에서 내려오다가 경찰관들에게 발각됐다. 이들은 인근에서 또 다른 승합차를 훔친 후 이를 몰고 대청댐으로 달아났다. 대청댐에 도착한 이들은 나룻배를 타고 주차장 맞은편 기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었다. 이들은 경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호숫가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현장에는 경찰 헬기까지 출동한 상황이었다. 무장한 경찰들이 둘러싼 후 자수를 권유하자 박봉선은 오전 11시45분께 “김군은 큰 죄가 없다. 자수하러 보내겠다. 대신 배가 고프니 빵과 술을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탈주범들 중 유일한 10대였던 김모군이 검거되는 모습을 담은 1990년 12월 28일자 경향신문 기사.
김군을 경찰에게 인계한 박봉선은 계속해서 권총을 들고 있었고, 신광재는 옆을 지켰다. 경찰이 ‘자수의사가 있으면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려라’고 방송을 했지만 권총을 내려놓지 않았다.

경찰이 사방에서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오던 낮 12시17분께 권총을 든 채 쪼그리고 앉아있던 박봉선이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겨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후 신광재가 곧바로 떨어진 권총을 잡은 후 “죽어버리겠다”고 소리친 후 자신의 가슴에 총기를 발사했다. 총기 위협을 우려한 경찰들은 곧바로 신광재에게 총기를 발사했다. 신광재는 병원 후송 중 사망했다.

교도소 내 횡포에도 ‘모범수’ 분류

검경은 생존한 김군을 상대로 탈옥 관련한 의혹에 대해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했다. 김군은 수사기관에서 “1991년 1월 청송교도소로 이감 예정이었던 박봉선이 함께 탈옥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해서 따라갔다”고 주장했다.

조사 결과 사다리 제작에 이용한 못과 쇠창살을 자를 때 사용한 쇠톱은 모두 작업장에서 몰래 반입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박봉선은 교도소에서 교도관들로부터 각종 특혜를 받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탈옥 당시 입었던 옷도 3주 전 박봉선의 부탁을 받은 지인이 교도소 앞 가게에 맡겨둔 것을 한 교도관이 찾아간 후 박봉선에게 전달한 것이었다.

전과 5범으로 교도소 내에서 다른 재소자들을 상대로 금품을 빼앗는 등의 횡포를 저질러온 박봉선은 교도소에서 모범수로 분류돼 있었다. 또 박봉선은 탈주 과정에서 택시기사에서 “교도소에서 담배를 팔아 100만원을 벌었다”는 말도 했다.

탈옥 사건의 여파로 3명의 교도관이 구속됐다. 사복을 박봉선에게 전달했다 구속됐던 교도관은 수감 중이던 전주교도소 독방에서 “동료 교도관의 꾐에 빠져 저지른 잘못이었다”는 유서와 함께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다.

이와 별도로 당시 전주교도소장은 해임됐고 일반 교도관 10명이 파면·해임 당하는 등 34명이 징계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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