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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산업은행의 대리인 비용

좌동욱 기자I 2010.03.22 14:21:04
[이데일리 좌동욱 기자] 최근 민유성 산은금융그룹 회장(사진)이 한껏 고무돼 있다고 한다. 어려운 결정을 내린 후 `임명권자(이명박 대통령)의 뜻`이라거나 `임명권자의 판단을 받겠다`는 자신감도 자주 내비친다. 
 
민 회장은 지난 9일 공공기관 선진화 워크숍 후 청와대에서 열린 부부 동반 만찬회에서 이 대통령과 함께 `헤드 테이블`에 앉았다. 이날 만찬에 참석한 공공기관장은 모두 77명. 헤드테이블에 앉았다는 영광(?)만으로 산업은행 임직원들의 어깨가 펴지는 것이 `한국형 공기업`의 현실이다.
 
민 회장이 어떤 덕담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산업은행을 바라보는 내·외부 시선엔 여전히 걱정이 가득하다. 2008년 정부가 발의하고 지난해 4월 국회가 법을 통과시킨 민영화 관련 법안 때문이다.
 
정책금융을 해봤다는 대부분의 관료들과 전문가들은 이 법을 두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생아(私生兒)`라고 한탄한다. 법안은 정책금융공사를 신설해 산업은행의 정책금융을 맡기고, 산업은행은 지주사로 묶어 민간에 팔겠다는 간단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국내외 증시 상장, 은행 인수·합병(M&A), 정책금융공사 조직 확대 등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우리금융 민영화가 객관식 답안이라면 산업은행 민영화는 주관식에 가깝다"며 "출발이 잘못된 상황에서 바람직한 방향을 잡기가 매우 힘들다"고 토로한다. 
 
어려운 문제라면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해결해 나가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현 경제팀에서는 그런 의지를 읽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진동수 금융위원장은 "올해는 우리금융(053000) 민영화에 주력하고 내년 이후 산업은행 민영화를 본격 추진하겠다"고 분명한 선을 긋고 있다. 정부는 산업은행이 희망하는 외환은행(004940) 인수 뿐 아니라 해외 금융회사 M&A에 대해서도 `노(NO)`라는 분명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런 정책방향에는 청와대-기획재정부-금융당국 등 현 경제라인 수장(首長)들이 공감대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견 `선택과 집중`이라는 합리적인 결정으로 비쳐지지만 이면엔 자신들의 임기 중에 골치아픈 일은 덮어두겠다는 `속내`도 있는 게 아니냐는 지적에서 자유로워 보이진 않는다. 
 
정책수장의 잦은 교체는 필연적으로 `대리인 비용`을 초래한다. 임기 내 달성할 수 있는 정책과제와 당장 성과를 낼 수 없는 장기 정책과제를 비교할 때 장기과제는 우선 순위에서 뒤처지기 마련이다. 
 
이미 MB(이명박) 정부 1기 경제팀이 2기 경제팀으로 교체되면서 산업은행 민영화 방향에 큰 단절이 생겼다. 민간 출신 중심의 정책 입안자와 관료 일색 계승자의 생각이 다른 탓이다. 만약 금융정책 라인이 새 진영으로 교체된다면 산업은행 민영화는 촉박한 일정에 쫓길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사례를 감안할 때 새 진영이 산업은행 민영화에 대해 공부부터 다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영화 진행과정에서 정부가 콘트롤하기 힘든 시장 상황까지 반영해야 한다.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산은법 개정안은 최초 지분 매각 시기를 법 시행 후 5년(2014년 5월)이내로 제한하지만 당초 대통령에게 보고한 안은 MB 임기내 지배 지분 매각을 포함한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미 법안 통과와 새 조직 신설에 2년 가까이 시간을 허비했고, 정권의 피할 수 없는 임기말 레임덕까지 고려하면 `올 한해 산업은행을 그대로 두겠다는 정책방향`은 공무원의 `무책임한 자세`로 비칠 수 있다. 심지어 정부의 대리인(관료)과 산업은행 대리인(민유성 회장)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조짐도 감지된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사석에서 "산업은행이 지금 해야 할 숙제들이 많다. 지금 산업은행이 태국은행이나 인수하려고 할 시점인가"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법이 국회를 통과한 이후 민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민간회사의 마인드를 주문하고 있으며, 실제 산업은행 임직원들의 `DNA`도 빠르게 민간화되고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최근 구조조정을 보면 정책금융으로서 산업은행의 역할은 확실히 달라졌다"며 "과거엔 우선 손해를 보고 시중은행들을 이끌어 리더십이 있었지만 지금은 손해를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은행들이 따라오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산업은행은 금호아시아나그룹 구조조정 와중에 보험업 라이센스(금호생명)를 챙겼고, 금호그룹 알짜 기업인 대우건설도 인수할 예정이다. 반면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금호타이어나 쌍용자동차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다. 신분보장이 더 불확실해진 산업은행 임직원들이 구조조정 기업 임원이나 사외이사 자리를 탐내야할 `인센티브`도 커질 수 밖에 없다.         
 
`발등의 불`이었던 금융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이런 정책의 단절은 중요치 않았지만 금융위기가 진정되자 이런 차이는 점점 산업은행의 `자생력`을 짓누르는 요인이 되고 있다. 민영화가 지체되면 공적 영역과 민간 영역을 함께 커버해야하는 기형적 조직이 시장에 주는 부담은 커질 게 명확하다.     
 
인사권자가 애초 민유성 회장을 산업은행장에 임명한 것은 민영화가 될 산업은행을 민간인에 맡기겠다는 단순한 논리에서다. 하지만 지금은 민 회장의 전공인 인수·합병(M&A)에 대해 손발을 묶어두고, 비전공인 정책금융을 맡기는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산업은행을 둘러싼 대리인들이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해법은 인사권자가 제시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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