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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소심 재판부는 “현주건조물방화치사는 사형 또는 무기, 7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는 매우 무거운 범죄”라며 “이 범행으로 건물이 모두 탔고 피해자는 생명을 잃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A씨 측의 지속적인 폭력에 노출된 상태에서 저지른 정당방위 또는 과잉방위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정방당위 요건인 상당성 등이 결여된 행위이기 때문에 이를 인정할 수 없다”며 “불을 질러 사람을 사망하게 한 행위는 사회통념상 용인되지 않으며 무방비 상태의 피해자를 숨지게 한 것은 능동적 공격 의사”라고 판단했다.
다만 “피고인은 장기간 교제 폭력으로 무기력감과 분노를 느낀 상태였지만 피해자가 깨어나면 같이 불을 끄려고 했다는 진술 등으로 미뤄 확정적 살해 의도로 범행에 이르렀다기보다는 미필적 고의를 갖고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며 “이러한 사정을 모두 고려했을 때 원심의 형은 너무 무거워 부당하다고 보인다”고 판시했다.
A씨는 지난해 5월 11일 오전 3시께 전북 군산시 한 주택에 불을 질러 남자친구인 30대 B씨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그는 자신이 낸 불이 주택 전체로 번진 이후에도 119에 신고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본 것으로 드러났다.
수사기관에 “B씨와 5년간 사귀면서 잦은 폭력에 시달렸다”고 주장한 A씨는 범행 당일에도 술을 마신 B씨에게 얼굴 등을 여러 차례 맞은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방화 이후 화재를 지켜본 이유에 대해 “불이 꺼지면 안 되니까… 만약 그 불이 꺼졌다면 제가 죽었다”라고 진술하기도 했다.
B씨는 2023년 특수상해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징역 1년의 실형을 받았으나 출소 이후에도 A씨를 폭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판결문에 따르면 B씨는 “너 때문에 감옥 갔다”며 A씨의 목을 조르거나 발로 걷어차는가 하면, 흉기로 위협했고 담뱃불로 A씨에게 큰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은 누구도 함부로 처분할 수 없는 절대성을 지녔으므로 이를 침해하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며 A씨에게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A씨에게 정당방위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군산 교제 폭력 정당방위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이날 선고 직후 전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교제 폭력 피해자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이번 판결은 대한민국 사법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고 성토했다.
전국 34개 여성단체로 구성된 대책위는 A씨를 ‘피고인’이 아닌 ‘생존자’라고 강조했다.
대책위는 “이번 사법부의 판결은 교제 폭력 피해자가 죽어야만 비로소 피해 사실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처참한 현실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가 됐다”며 “지금 이 순간에도 남성 파트너에 의해 폭행당하거나 살해당하는 여성들을 보호하기 위한 대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