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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0.005초 차' 20년 만에 美단거리 자존심 세운 노아 라일스[파리올림픽]

이석무 기자I 2024.08.05 13:31:48
20년 만에 올림픽 남자 100m 금메달을 미국에 안겨준 노아 라일스. 사진=AP PHOTO
7번 레인에 위치한 노아 라일스가 간발의 차이로 남자 100m 결승선을 가장 먼저 통과하고 있다. 사진=AP PHOTO
[이데일리 스타in 이석무 기자] 거의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심지어 100분의 1초까지 같았다. 하지만 정말 간발의 차이로 희비가 엇갈렸다. 2024 파리올림픽 육상 남자 100m 결승전 얘기다.

미국 육상 단거리의 ‘신성’ 노아 라일스(27·미국)가 키셰인 톰프슨(23·자메이카)을 제치고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됐다. 둘의 차이는 겨우 0.005초 차였다.

라일스는 5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2024 파리 올림픽 육상 남자 100m 결선에서 9초784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반면 2위인 톰프슨은 9초789을 기록했다.

도쿄올림픽 은메달리스트 프레드 컬리(미국)가 9초81로 3위를 차지했다. 도쿄 대회에서 깜짝 금메달을 차지했던 마르셀 제이컵스(이탈리아)는 9.85로 5위에 머물렀다.

이로써 라일스는 2004 아테네 대회 저스틴 개틀린 이후 20년 만에 올림픽 육상 남자 100m에서 우승한 미국 선수로 기록됐다.

레이스 중반까지는 4번 레인의 톰프슨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반면 7번 레인의 라일스는 첫 10m까지 꼴찌, 20m까지 5위에 머물렀다. 하지만 막판 30m 정도를 남기고 무섭게 따라잡으며 톰슨과 거의 동시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육안으로는 누가 먼저 들어왔는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라일스와 톰프슨 역시 우승을 확신하지 못하고 전광판을 바라봤다. 전광판에 나온 기록은 두 선수 모두 9초79였다. 육상의 공식 기록은 100분의 1초까지다. 1000분의 1초가 넘으면 앞 단위를 올려 계산한다. 하지만 100분의 1초까지 같으면, 1000분의 1초까지 세부 기록을 공개한다.

잠시 후 전광판에는 ‘라일스 9초784’, ‘톰프슨 9초789’라는 세부 기록이 떴다. 순간 초조하게 기록을 기다리던 라일스는 어린아이처럼 펄쩍 뛰며 기뻐했다. 올림픽 공식 타임키퍼 오메가가 공개한 포토피니시 사진을 보면 라일스의 가슴이 톰프슨보다 불과 몇 cm 앞에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라일스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솔직히 톰프슨이 우승한 줄 알았다”며 “그런데 내 이름이 맨 위에 올라와있는 것을 보고 ‘오 마이 갓, 믿어지지 않아’라는 말이 튀어나왔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가장 큰 무대에서, 가장 큰 압박을 받으며, 최고 중 최고 선수들을 상대로 이런 성과를 내 너무 자랑스럽다”고 덧붙였다.

미국 선수가 올림픽 남자 100m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무려 20년 만이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육상 단거리 절대강자다. 남자 100m의 경우 첫 근대올림픽인 1896년 아테네올림픽부터 미국이 절반 이상 금메달을 독식했다.

미국의 남자 100m 독주 행진은 2004 아테네올림픽에서 우승한 개틀린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개틀린은 2006년 금지약물 양성반응으로 4년 출장 정지를 받고 명성이 땅에 떨어졌다. 이후 남자 단거리는 ‘번개맨’ 우사인 볼트(자메이카)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볼트는 2008 베이징, 2012 런던, 2016 리우데자네이루 대회에서 100m와 200m를 휩쓸면서 자메이카의 전성시대를 알렸다.

볼트가 은퇴한 뒤 2021년에 열린 도쿄 대회에선 이탈리아의 제이콥스가 우승했다. 올림픽 남자 100m에서 유럽 선수가 우승한 것은 1992 바르셀로나 대회 린포드 크리스티(영국) 이후 29년 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 라일스가 20년 만에 금메달을 가져오면서 미국 육상의 자존심도 되살아났다.

라일스는 뛰어난 실력 만큼이나 튀는 발언으로 관심을 끈다. 그는 과거 SNS를 통해 “미국프로농구(NBA) 파이널 우승팀을 왜 월드챔피언이라 부르는 거야”라고 디스해 논란을 빚었다. NBA 선수들이 이에 집단으로 발끈했고 SNS 상 설전이 벌어졌다.

라일스의 발언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후 르브론 제임스가 중심이 돼 NBA 최고 선수들이 미국 농구대표팀에 모였고 파리올림픽에 참가했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두고 “라일스의 한 마디가 미국 농구를 각성시켰다”고 평가했다.

공교롭게도 라일스가 100m 우승을 차지하자 가장 열렬히 축하해주는 이들도 NBA 선수 및 관계자들이다. ‘NBA 레전드’ 매직 존슨은 “우리 모두 라일스가 금메달을 따는 모습을 지켜보고 응원했다”며 “미국이 20년 만에 남자 100m 금메달을 따냈다. 정말 흥분되는 레이스였다”고 SNS에 글을 올렸다. 뉴욕 닉스의 간판스타 조쉬 하트 역시 “라일스는 이제 평생 그런 말을 해도 괜찮다”고 기뻐했다.

사실 라일스의 삶이 순탄하기만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어린 시절 트랙보다 병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이 때는 천식을 앓았고, 고교 시절에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와 난독증 진단을 받았다. 유명한 운동선수가 된 2020년에는 “항우울제를 복용하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라일스는 한 인터뷰에서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하는 건 대단한 용기다. 치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며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언제라도 ‘나는 지금 아프다. 치료받는 중이다’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밝혔다.

라일스가 남자 100m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사실 그의 주종목은 200m다. 2019년 도하, 2022년 유진 세계선수권에서 200m 2연패를 달성했다. 당초 100m는 우승 후보로 꼽히지 않았다.

라일스는 3년 전 도쿄 대회 남자 200m에서 동메달에 그쳤다. 하지만 지금 컨디션이라면 무난히 금메달을 추가할 수 있을 전망이다. 라일스는 “내가 그때 우승을 했다면 나는 아마 정체됐을지도 모른다”며 “도쿄에서의 아쉬운 결과가 내 욕망을 자극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라일스는 400m 계주와 1600m 계주에도 출전할 예정이다. 지금 기세라면 볼트도 이루지 못했던 올림픽 4관왕도 충분히 노려볼만 하다. 통산 금메달 8개를 차지한 볼트는 2008 베이징 대회에서 4관왕에 오른 바 있다. 하지만 이후 동료의 금지약물 양성반응으로 400m 계주 금메달이 박탈되면서 3관왕으로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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