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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혁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그에게 남은 건 ‘무관, 그러나 5번의 올림픽 도전’ 뿐이었지만 그는 후배들을 더 빛나게 하는 자리에 기꺼이 나섰다. 당시 이규혁은 환하게 웃으며 “실패를 극복하는 법은 내가 제일 잘 안다. 이제 후배들을 위해 그 힘을 쓸 것”이라고 했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가 웃으며 자신의 첫 번째 인생을 정리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규혁은 그 순간에도 울고 있었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를 억누르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그의 진심은 한 방송사의 카메라에 잡혀 있었다. 밴쿠버 올림픽 스피드 스케이팅이 모두 끝난 경기장을 홀로 떠나지 못한 채 서서이던 모습. 그리고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실패를 참는 건 정말 자신 있었는데 이번은 정말 힘들다.”
그때 그는 어쩌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아직 할 수 있다는 열정이 가슴 속에서 조금도 식지 않은 상황. 가만히 묻어두로 포기하려 해도 울컥 울컥 솟아 오르는 깊은 곳의 울림. ‘끝까지 한 번 더 해보자.’
그러나 세상의 눈이 그를 어떻게 바라볼지는 뻔했다. 4년 후 소치올림픽이라면 만 나이로도 서른 여섯이 된다.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로 뛴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나이였다. 후배들 자리나 막고 서 있는 걸림돌 취급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규혁은 그 모든 비난을 딛고 다시 빙판에 섰다. 은퇴 선언과 자존심은 열정 아래로 접어두었다.
그리고 또 그는 실패했다. 10일(이하 한국시간) 러시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에서 1,2차 합계 70초65의 기록으로 18위에 그쳤다. 그가 올림픽 메달에 가장 가까이 갔던 1000m(토리노. 4위)가 남아 있지만 그 역시 메달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하지만 이규혁은 이미 승자의 길을 걷고 있다. 열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도전, 끝이 무엇인지 알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진심은 보는 이들에게 충분히 전달됐기 때문이다. 그 보다 높이 올라 간 사람은 많아도 그 만큼 많은 울림을 전해준 이는 많지 않다.
영화 록키 발보아는 60에 접어 든 한물 간 챔피언 록키가 20대의 새파란 현역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영화다. 록키는 말리는 옛 스승에게 “내 가슴에서 야수가 울부짖고 있어요”라며 목놓아 운다. 그리고 조용히 도전을 준비한다.
장성한 그의 아들은 록키에게 소리친다. “당신의 아들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세요. 그런데 또 사람들이 조롱하는 아버지를 보란 말인가요. 당장 그만두세요.”
록키는 그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가 얼마나 센 펀치를 날리느냐가 아니라 네가 수 없이 많은 펀치를 맞으면서도 앞으로 전진하고 하나씩 얻어가는 것이 진정한 승리란다.”
영화에서 처럼, 이규혁은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 이미 승리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