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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슬기(23)는 큰 아픔을 이겨냈다. 중학교 2학년 때 췌장암으로 투병 중이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어린 그에겐 세상을 모두 잃은 것보다 더 큰 슬픔이었다.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필드에 선 정슬기가 엄마와의 약속을 지켰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우승트로피를 들고 엄마를 만나러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눈물을 참지 못했다.
◇데뷔 6년, 76전 77기 끝에 찾아온 첫 우승
마지막 18번홀(533m). 첫 우승을 앞둔 프로 6년 차 정슬기의 표정은 담담했다. 마치 몇 번 우승했던 선수처럼 긴장감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약 1m 거리의 파 퍼트를 남기고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렸다. 그는 자신 있는 퍼트로 파를 지켜낸 뒤 주먹을 불끈 쥐었다. 1타 차 선두로 먼저 경기를 끝내면서 데뷔 첫 우승을 눈앞에 뒀다.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부친 정지욱(60) 씨는 대견한 듯 흐뭇해했다. 잠시 후 뒤에서 경기를 펼친 김지영(22)의 버디 퍼트가 홀을 벗어나면서 정슬기의 우승이 확정됐다. 동료는 첫 우승에 성공한 정슬기에게 꽃가루를 뿌려주며 축하했다.
정슬기가 9일 경기도 용인시 써닝포인트 컨트리클럽(파72·6055m)에서 열린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 제8회 KG·이데일리 레이디스오픈 with KFC(총상금 5억원·우승상금 1억원)에서 긴 무명 생활을 벗어던졌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2언더파 70타를 친 정슬기는 합계 10언더파 206타를 쳐 김자영(27)·배선우(24)·이정민(26)·하민송(22)·김지영(21·이상 9언더파 207타) 등 공동 2위 그룹을 1타 차로 따돌리고 우승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정규 투어 77번째 대회, 프로 데뷔 6년 만에 들어 올린 감격의 첫 우승이다.
◇두 어머니에게 모두에게 감사 드려
정슬기가 골프채를 처음 잡은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다. 골프를 좋아하는 아버지를 보고 따라하기 시작했다. 부친 정 씨는 경북 봉화에서 양어장과 식당을 했다. 딸이 골프를 배우고 싶다는 말에 식당 옆 작은 공터에 고무 매트를 깔아 간이 연습장을 만들어줬다. 30m가 조금 넘는 짧은 거리의 간이 연습장이었지만, 정슬기에겐 유일한 놀이터였다. 그날 이후 정슬기는 학교에 가기 전 그리고 다녀온 후에는 연습장에서 공을 치며 놀았다. 점점 골프에 빠져든 정슬기는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는 방학을 맞아 하와이에 사는 이모 집으로 가 한두 달씩 정식 레슨을 받으며 골프를 배웠다.
골프밖에 모르고 살던 정슬기에게 큰 아픔이 찾아온 건 중학교 2학년 때다. 1년 넘게 췌장암으로 투병 생활을 해오시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정슬기는 어머니가 병상에 누워계실 때도 어머니를 위해 골프를 떠올렸다. 어머니를 만나러 갔다가도 인근 골프연습장에 들러 연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갈 정도였다. 그랬던 정슬기에게 어머니와의 이별은 절망에 가까웠다.
정슬기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더 열심히 했다. 한동안 골프를 멀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잘할 수 있는 게 골프였기에 더 푹 빠져들었다. 그는 “엄마와의 약속도 있었지만, 우승이라는 걸 꼭 한 번은 해보고 싶었다”면서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정슬기에겐 3년 전 두 번째 엄마가 생겼다. 고등학교 때부터 경기도 용인으로 올라와 골프연습장에서 훈련하며 지내온 그에겐 큰 힘이 됐다. 정슬기는 “저를 위해 절에 다니시면서 기도도 해주시고, 집에 내려가면 잘 챙겨주신다”면서 “지금의 어머니에게도 매우 감사드린다”고 또다시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우승 직후 방송에서 덤덤한 인터뷰를 하던 그는 기자회견에서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첫 우승 발판 더 큰 선수 될 것”
2013년 프로가 된 정슬기는 드림(2부) 투어에서 꿈을 키웠다. 첫해 상금랭킹 39위에 그치면서 정규투어 진출에 실패했다. 이듬해 또 한 번 꿈을 안고 드림 투어에서 뛰었지만, 더 큰 시련을 맛봤다. 상금랭킹 52위에 그치면서 꿈에서 더 멀어졌다. 2015년 드디어 목표를 이뤘다. 드림 투어 상금랭킹 3위에 올라 정규투어 입성에 성공했다.
1995년생은 한국여자골프를 이끌 차세대 스타들이 즐비한 ‘황금세대’다. 고교생 신분으로 한국과 일본 프로대회에서 우승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김효주와 2014년 KLPGA 투어를 뜨겁게 달궜던 고진영·백규정·김민선이 모두 1995년생이다. 골프계에선 이른바 ‘세리키즈’로 통하는 1988년생 이후 가장 막강한 실력을 갖춘 세대로 불렸다. 그 틈에서 정슬기는 빛을 보지 못했다. 국가대표는 커녕 상비군 한 번 해보지 못했다.
잘 나가는 동기생들에 비하면 프로 진출도 늦었다. 2016년 정규투어에 올라온 그는 첫해 상금랭킹 40위에 그쳤다. 카이도 MBC 플러스 여자오픈 준우승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투어의 최강자로 성장한 동갑내기들에 비하면 내세울 만한 성적은 아니었다. 2년차인 2017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촌 허니 레이디스오픈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깜짝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다. 오히려 1년 전보다 상금랭킹이 뒤로 밀려 47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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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슬기의 장점은 두둑한 배짱과 정확한 샷이다. 그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본 적이 없어 그들에 비하면 실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했다”면서 “하지만 투어에 올라와 경기를 하다 보니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내 경기에 집중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긴 시간 2부 투어를 전전하면서 다져진 결과다.
KG·이데일리 레이디스 오픈 with KFC 우승으로 모든 걱정을 단박에 날렸다. 이날 우승으로 상금 1억원과 함께 2년 시드를 보장받았다. 상금 랭킹은 29위(1억7001만3403원)까지 끌어올렸다. 정슬기는 KG·이데일리 레이디스 오픈 with KFC 우승으로 새로운 스타 탄생을 알렸다. 지난해 김지현(27)은 이 대회에서 데뷔 7년 만에 처음 우승을 차지한 뒤 KLPGA 투어의 강자로 우뚝 섰다. 정슬기는 바닥부터 기본을 다져온 숨은 실력파다. 이번 우승으로 이름을 알리는 동시에 2015년 김민선(23)·2016년 고진영(23)이 우승 후 스타덤에 오른 1995년생 대열에 합류했다. 정슬기는 “(나도 김지현 선수처럼)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더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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