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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픈을 주관하는 R&A는 “대회 명칭은 처음부터 디오픈이었고 한 번도 브리티시 오픈이었던 적이 없다”고 못박았다. “브리티시 오픈이라는 표현은 주로 미국 미디어들이 US 오픈 등과 구별하기 위해 부른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자존심 때문에 ‘최초’의 의미를 지닌 디오픈을 평가절하한다는 것이다. 2005년 미국 방송사인 ESPN과 ABC는 대회명을 디오픈이라고 인정했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는 2013년부터 투어 일정표에 디오픈이라고 공식 표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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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디오픈은 1860년 10월 스코틀랜드 아이셔의 프레스트윅 골프클럽에서 열렸다. 당시 12홀 코스였으며 하루에 3번을 돌아 총 36홀 경기로 진행됐다. 19세기 중반에는 주로 형편이 넉넉한 신사들이 골프를 쳤다. 수제 클럽과 공이 비쌌기 때문이다. 프로 골퍼들은 캐디, 볼 및 클럽 제작, 레슨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프로들을 위해 처음 개최된 디오픈 초대 챔피언에 오른 건 윌리 파크 시니어(스코틀랜드)다.
디오픈 탄생 배경이 흥미롭다. 인류 최초의 프로 골퍼는 세인트앤드루스 올드 코스의 헤드 프로를 겸하던 앨런 로버트슨(스코틀랜드)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내기 골프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최고의 골퍼였다. 프레스트윅 골프클럽의 설계자 올드 톰 모리스는 로버트슨이 세상을 떠난 뒤 ‘이제는 누가 최고의 골퍼인가’라는 궁금증이 생겨 최강자를 가리기 위해 대회를 개최한 것이 디오픈의 탄생 배경으로 전해진다.
상금이 도입된 건 1863년부터다. 당시 총상금은 10파운드(약 1만5000원)였고 2위부터 4위까지 상금을 나눠가졌다. 우승자는 가죽으로 만든 은제 챔피언 벨트인 ‘챌린지 벨트’를 받았다. 이 벨트는 당시 25파운드(약 3만8000만원) 상당의 우승 상품이었다. 3년 연속 우승하면 벨트를 영구히 우승자가 소장했다. 톰 모리스 주니어가 1870년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벨트를 영구 소장하게 됐고, 이듬해 대회는 챔피언 벨트가 없어 열리지 못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그래서 1872년부터 지금의 디오픈 우승컵인 은색 주전자 ‘클라레 저그’를 새롭게 만들었다.
1871년 이후 1915~19년, 1940~45년 제1·2차 세계대전으로 대회가 열리지 못했고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회가 취소된 바 있다. 이를 제외하고 150년의 역사가 쌓인 디오픈은 14일부터 17일까지 영국 스코틀랜드의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다.
초창기 10파운드(11.90달러)였던 상금은 올해 약 1166배가 늘어난 1400만 달러(약 182억6000만원)로 증액됐다. 우승자는 250만 달러(약 32억6000만원)를 받는다. 디오픈에서 한 번이라도 우승을 하면 60세까지 출전을 보장받는다. 또 향후 5년 동안 마스터스, PGA 챔피언십, US 오픈 등 다른 메이저 대회에도 출전할 수 있다.
디오픈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1896년부터 1914년까지 총 6번 정상에 오른 해리 바던(잉글랜드)이다. 골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인 아널드 파머(2회)와 잭 니클라우스(3회), 타이거 우즈(3회·이상 미국)도 역대 챔피언들이다. 우즈는 올해 대회에서 통산 4번째 클라레 저그를 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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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디오픈 정상에 오른 헨리크 스텐손(스웨덴)은 역사적 명승부를 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스텐손은 필 미켈슨(미국)과 챔피언 조에서 맞대결을 벌인 두 선수는 매홀 버디를 주고받으며 마지막 홀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접전을 펼쳤다.
이 경기는 39년 만에 재현된 ‘백주의 결투’라는 찬사를 받았다. 골프 팬들은 1977년 대회에서 톰 왓슨(미국)의 니클라우스의 대결을 떠올렸다. 당시 왓슨과 니클라우스는 3라운드까지 사흘 내내 공동 선두에서 혈투를 펼쳤다. 왓슨이 최종일 17번홀까지 가까스로 1타를 앞선 상황에서 니클라우스는 티 샷이 훅이 나 러프에 빠지고 말았다. 난관에 빠진 니클라우스는 그린 앞쪽에 공을 올려놓은 뒤 11m나 되는 장거리 버디 퍼트를 집어넣으며 결코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1m 버디 퍼트를 남긴 왓슨은 이를 놓치지 않고 우승을 1타 차 우승을 확정했지만 이들의 접전은 4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디오픈 역사상 최고의 경기로 꼽힌다.
올해 대회가 열리는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도 수차례 명승부가 만들어졌다. 니클라우스는 1970년 더그 샌더스(미국)와 1박2일간 연장 혈투를 펼친 끝에 우승을 차지해 올드코스에서도 클라레 저그를 들어올렸다. 2005년 은퇴 무대로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디오픈을 택한 그는 은퇴 경기에서 명물 18번홀 스윌컨 다리를 건너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1984년 왓슨의 3연패를 저지하고 정상에 오른 세베 바예스테로스(스페인)의 우승도 올드코스의 명승부로 꼽힌다. 2000년 2위 그룹을 8타 차로 따돌리고 유유히 우승을 차지한 우즈도 빼놓을 수 없다. 우즈는 이 우승으로 24세의 나이에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1927년 디오픈 2연패를 달성한 바비 존스(미국)는 1라운드에서 68타를 치며 메이저 대회 역사상 최초로 60대 타수를 작성했고, 무려 36m 이글 퍼트에 성공하기도 했다. 존스는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세인트앤드루스의 명예 시민으로 선정됐다.
1876년 밥 마틴은 최종 라운드에서 데이비드 스트래스(이상 스코틀랜드)와 동타를 이뤄 연장전을 치러야 했으나 스트래스가 연장전을 거부해 우승할 수 있었다. 17번홀에서 스트래스의 샷이 다른 선수를 맞추고 홀 부근에 떨어졌는데 이로 인해 마틴과 동타를 이뤘으나, 갤러리들은 당시 스트래스의 공이 선수를 맞지 않았으면 그린을 넘어갔을 것이라며 그가 에티켓이 부족해 이익을 얻었다고 수군댔다. 주최 측 관계자들도 쉽사리 판정을 내리지 못해 이에 격분한 스트래스는 연장전 출전을 거부했다. 마틴 홀로 플레이오프 경기를 펼쳐 우승을 확정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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