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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 '엘르', 난교의 혼란속으로 그리고 세상 속으로

고규대 기자I 2017.06.26 05:30:23

영화 '엘르' 리뷰

영화 '엘르'

[오동진 영화평론가] 제74회 올해 골든 글로브시상식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차지하고 89회였던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라 화제를 모았던 영화 '엘르'는 주인공 미셸(이자벨 위페르)이 주최한 디너 파티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미셸은 비교적 ‘잘 나가는’ 게임업체 사장이다. 친구 안나(앤 콘시니)와 동업을 하고 있다. 둘의 시작은 원래 출판사였다. 근데 게임 소프트를 개발해 대박을 쳤다. 미셸은 얼마 전에 복면을 쓴 괴한에게 강간을 당했다.

디너 파티는 원래 화기애애할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미셸이 마련한 저녁 식사 자리는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다.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미셸을 (성)폭행한 용의자이거나 혹은 ‘할’ ‘잠재적’ 용의자 같은 느낌을 준다. 적어도 그런 비뚤어진 욕망과 증오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어쨌든 바로 이중에 범인이 있다.

미셸의 엄마 이렌느(주디스 마그르)는 노년이지만 늘 젊은 제비족을 꿰차고 산다. 미셸은 그런 그녀를 경멸한다. 엄마의 ‘호스트 바’ 남자는 자신이 돈 때문에 늙은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미셸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기가 미셸을 증오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안다는 것을 안다. 유력한 용의자다. 한가지 더. 엄마와 미셸은 마을 사람들을 불태워 죽인 연쇄살인범을 각각 남편과 아버지로 두고 있는, 결코 세상에 내놓기 어려운 비밀을 간직하고 사는 모녀다. 아버지에 대한 미셸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그걸 젊은 남자와 성형수술로 풀고 사는 엄마를, 평생을, 미워하며 살게 한 요인이다.

미셸은 또 죽마고우인 안나와는 레즈비언에 가까운 관계다. 둘은 선을 넘어설까 말까 머뭇거리며 지내 왔다. 하지만 미셸은 안나의 남편인 로베르트(크리스티안 베르켈)와 8개월 전부터 ‘섹파(섹스 파트너)’인 사이이기도 하다. 로베르트는 미셸과 ‘관계’를 더 나아가고 싶어 한다. ‘섹파’말고 ‘정기적’ 애인이 되고 싶어 한다. 미셸은 그걸 거부하고 있는 중이다. 고로 로베르트도 용의자다. 만약 안나가 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면 또 다른 용의자다. 청부 폭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셸의 전 남편 리샤르(샤를르 베를링)와 그의 애인(비말라 폰즈)도 용의자다. 전 남편은 미셸의 게임 사업에 스토리를 팔고 싶어 한다. 미셸은 시덥지 않아 한다. 그도 그래서 가능한 용의자다. 여기에 조금 묘한 분위기의 옆집 부부, 파트릭(로랑 라피에)과 레베카(비르지니 에피에)까지 더해진다. 이들은 낯선 사람들이다. 당연히 용의자다. 모두들 미셸의 거만스러움과 표독스러운 말투를 싫어 한다. 그들 모두는 그녀를 한번쯤 ‘응징’하고 싶어 한다. 이들 중 범인은 누구인가. 모두인가. 아니면 아무도 아닌가. 그녀가 의문의 강간을 당했음에도 비교적 ‘잘 참아’ 넘기며 지내는 것은(그녀는 그후에도 몇 차례 더 폭행을 당한다.) 원래 그 같은 성적 판타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미셸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영화 '엘르'

첫 장면부터 가학적인 섹스 장면, 성폭행 신으로 마음을 한껏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는 보통의 장르 영화, 미스터리 스릴러와는 달리 중간중간 한번도 꽉 막힌 감정을 풀어주지 않는다. 강간, 구속(bondage)에 대한 환상, 훔쳐보기(pipping)를 통한 자위 행위, 늙은 여자와 지나치게 어린 남자와의,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섹스 그리고 절친 남편과 치르는 남몰래 섹스, 그런 남자의 부인과의 동성애 등등 이른바 영화는 모든 일탈(逸脫)의 행위로 점철된다. 

이상한 것은 그게 점점 하나도 이상해지지 않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영화가 종종 가져다 주는 비현실의 현실성, 그러니까 보통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혹은 그 반대로 현실에서나 가능한 일이 영화에서 기록되 듯 펼쳐지는 것 같은 ‘이상한 역전(逆轉)의 정서’가 느껴진다. 기시감(旣視感)의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건 우리 모두가 살면서 실제로 겪고 있는 일이 아니던가. 안 그런 척 하고 있을 뿐이 아니던가.

'로보캅' '토탈 리콜' '원초적 본능' 등으로 1980년대 후반 가장 ‘파격적인’ 감독 소리를 들었던 폴 버호벤은 이후 오랫동안 자신의 연출력을 조금씩 소진하며 살아 왔다. 그가 네덜란드 시절에 만든 초기작 '사랑을 위한 죽음(1973·Turkish Delight, Turks fruits)'과 '아그네스의 피(1985·Flesh+Blood'에서 보여 준 열정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이번 '엘르'는 그래서 폴 버호벤의 ‘귀환같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는 그가 옛 연출력을 회복했음에 축하해 준 셈이다. 

소극적으로 보면 '엘르'는 버호벤의 ‘변칙적인(geek)’ 정서가 되살아 났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다분히 지나치게 ‘프랑스적’이거나 ‘유럽적’인 분위기(미국=프로테스탄트인 척하는 도덕적 관계를 보여주기 보다 그걸 다 해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서. 예컨대 마크 롱과 브리지트 트로뉘 프랑스 대통령 부부처럼.)이긴 하지만 적어도 폴 버호벤이 지닌 세상에 대한 시선, 그 날카로움(edge)이 아직 펄펄 살아있음을, 역시 남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기이하게도 프랑스의 정치판이 느껴진다,고 하면 그건 지나친 확대 해석일 수 있겠다. 그래도 그렇게 보여지기도 한다. 프랑스는 현재 공화-사회의 양당 체제가 완전히 붕괴하고 정치 신인으로 돌풍을 일으킨 마크 롱 대통령의 ‘레퓌블리크 앙마루슈’를 비롯해 극우파인 ‘국민전선’과 급진좌파 정당 ‘포데모스’, 우파 정당 ‘내셔널 프론트’ 등등까지 모든 정파들이 난립돼 있는 상황이다. 누가 누구와 연정을 하고 손을 잡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건 영화 속 주인공 미셸이 누구와 잠을 자고, 누구에게 성욕을 느끼며, 왜 성폭행의 환상까지를 지니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지,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점점 더 헷갈려지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 나아가 그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세상은 그 자체가 혼돈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도 혼란스러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셸과 그녀의 주변이 바로 그 같은 난교(亂交)의 혼탁을 대변한다. 그걸 정리하려는 순간 일상은 더욱 더 흩뜨려진다. 그 조류(潮流)에 의탁(依託)하게 되는 바로 그 순간, 삶과 세상의 진실이 찾아 온다. 그리고 평화가 다가 온다. 그런 법이다. 그것이 세상 이치일 수 있다. 그러니 공허한 논거(論據)를 만들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미셸이 자신이 당한 일을 경찰에 알리려 하지 않는 건 비단 아버지와 관련된 업보(業報) 때문만은 아니다. 영화 '엘르'는 바로 그 같은 시대정서를 탐미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엘르'

미스터리 스릴러지만 미셸의 강간범은 중간에 그 정체를 드러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는 오히려 그때부터 더욱 더 미스터리하게 흘러 간다.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그간의 영화 어법을 다 비켜가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캐릭터를 단 한 명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엘르'는 독특함의 정점을 찍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늘 새로워야 하고, 새로운 인물을 창조해 내야 한다는 점에서 '엘르'는 성취의 지점이 꽤나 높은 작품이다. 낯선 세상을 꿈꾸는 가.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게 현실이라는, 역설의 깨달음을 얻고 싶은 가. 당신은 지금의 세상에서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엘르'는 해답 없는 질문을 해대고 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정신적 만족감, 심지어 성적 쾌감 까지를 얻게 되는 작품이다. '베티 블루 37.2'의 원작을 쓴 필립 지앙의 소설 '오...'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언급할 필요도 없이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마치 미카엘 하네케와 함께 작업했던 '피아니스트' 때처럼, 그 전성기를 여전히 이어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60세가 넘은 여배우의 흩어진 옷가지와 그 틈으로 살짝 보이는 젖가슴이 이토록 섹시 하기는 쉽지가 않다. 이런 연기의 여신이 동시대에 함께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영화 마니아들에게는 행복한 일이다. 

◇[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은 영화평론가 오동진과 함께합니다.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상세하다 못해 깨알같은 컨텍스트(context) 비평을 꿈꿉니다. 그의 영화 얘기가 너무 자세해서 읽는 이들이 듣다 듣다 외치는 말, ‘닥쳐라! 영화평론’. 그 말은 오동진에게 오히려 칭찬의 글입니다. 위 글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닥쳐라!’ 댓글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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