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장인 리더십] 6회말, 지바에서 배운 미소

정철우 기자I 2007.11.16 08:23:08
▲ 지바롯데 코치 시절의 김성근 감독-김인식 WBC대표팀 감독

[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2002년 한국시리즈가 끝난 어느 날. 김성근 당시 LG 감독과 어윤태 구단 대표가 서울 시내 한 일식집에서 만났다. 김 감독은 이 자리에서 어 대표에게 악수를 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덕아웃에 나와 선수들하고 하이파이브도 하고 싶고 했을텐데 나 때문에 못했죠. 미안합니다. 올해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이때 어 대표의 답이 그 유명한 “올해 야구는 LG 야구가 아니라 김성근 야구였소”였다. 그러나 이번에 말하고픈 내용은 해임사태과 관련된 것이 아님으로 이쯤에서 갈무리.)

어 대표는 매우 열정적인 인물이다. 90년대 초 단장 시절 ‘신바람 야구’로 불리던 LG 야구의 이미지를 만드는데 나름 일조를 했었다. 경기를 이기면 선수들과 어울려 기쁨을 나누는 것도 중요한 그의 업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김 감독은 어 대표가 덕아웃에 나타나는 걸 꺼렸다. ‘신바람 야구’라는 허상은 LG 야구를 단단하게 만드는데 방해가 될 뿐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더라고 프런트에서 선수단에 간여하는 모양새 자체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2007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김성근 SK 감독은 구단측에 한가지 제의를 했다. “승리는 모두의 힘이 모아져 이룬 것인 만큼 다 함께 기뻐하자.”

구단 직원들은 어색해 했다. 김 감독의 스타일을 잘 아는 만큼 괜히 부담이 되면 어쩌나 싶어 머뭇거렸다. 그러나 김 감독은 진심으로 사장부터 말단 직원까지 모두가 함께 즐기기를 원했고 시간이 흐르자 모두가 자연스럽게 기쁨을 함께 했다.

김 감독의 변신은 2년간의 지바 롯데 코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메이저리그 1000승 감독인 바비 밸런타인 감독이 만들어 놓은 팀 분위기가 그를 바꿔놓은 것이다.

김 감독이 롯데에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이다. 김 감독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인사 하는게 너무 힘들어.”

김 감독은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스무살 이후 40년이 넘도록 한국에서만 살았다. 우리 문화가 훨씬 더 익숙할 수 밖에 없다. ‘인사는 하루에 한번’이 우리네 상식.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5분 전에 봤던 사람도 또 만나면 꾸벅 인사를 건네 왔다. 안부만 묻는 것이 아니었다. 토스 볼을 던져주면 “감사합니다”라고 큰 소리로 인사했고 훈련이 끝나면 “수고하셨습니다”라며 허리를 굽혔다.

한국 감독 생활이 뼈속까지 인이 박힌 김 감독에겐 하루에도 수십번씩 해야 하는 인사가 곤혹 스러웠던 것이다. 오죽 답답했으면 선수들에게 “너 좀 전에 인사 했으니 안해도 된다”고 까지 했을까.

고개만 끄덕 하는 정도는 그런대로 할 수 있었지만 상대가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네는데 입을 닫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김 감독도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겨우 꺼내 억지로 억지로 응대를 했다.

곤혹스러움은 오래지 않아 가셨다. 오히려 인사가 조금씩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자꾸 소리를 내면 낼 수록 스스로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그곳은 모든 사람들이 밝았다. 어두우면 그 속에서 살 수가 없더라. 모두가 쉽게 말이 나온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그런데 인사를 하면서 플러스 사고방식이 되더라. 하이 파이브도 하며 털어놓으니 가슴 속에 쌓인 무언가가 풀어지더라. 물론 속내를 다 드러내지는 않는다. 속은 속대로 가져간다. 그러나 분명한 건 밝아질 수록 마음이 가벼워진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밸런타인 감독의 오버 액션은 그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밸런타인 감독은 언제나 시끄럽고 동작이 크다.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고민이 뭘까”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다.

그러나 김 감독은 생각이 달랐다. “감독의 눈으로 보면 결국 그도 많이 외롭고 괴로워하더라”며 단지 “표현을 밝게 가져갈 뿐”이라고 해석했다.

김 감독은 “감독은 가슴 속에 담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그걸 침묵하면서 가져갔는데 바비는 달랐다. 담아두는 것은 담아두는 것이고 그 이외 부분은 크게 소리내어 털어내더라. 그런 에너지가 여유를 가져오고 팀을 생동감 있게 만든다는 걸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9월28일은 SK가 창단 처음으로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지은 날이다. 김 감독은 경기 후 축하파티 장소에서 선수들에게 “아까 운동장에서 헹가레 쳐주는 줄 알고 어깨 뒤 파스까지 떼어놓고 준비했는데 아무도 안해주더라”고 농담을 던졌다. 선수들은 그제서야 앞으로 뛰어나와 김 감독을 하늘 높이 올려주며 또 한번 기뻐했다.

예전같았으면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진지한 얼굴로 “아직 해야 할 일(한국시리즈 우승)이 남아있다”며 자제를 당부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김 감독은 이날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맥주 뿌리기 행사까지 직접 지시해 두었다. 생각도 않던 구단 직원들이 부랴 부랴 행사 준비를 하느라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했다.

공식 축하 행사가 끝나자 송태일 매니저가 김 감독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넸고 김 감독의 얼굴은 또 한번 환하게 빛이 났다.

송 매니저가 한 말은 “오늘 선수들이 그냥 집으로 다 가겠답니다. 진짜 기분은 한국시리즈 끝내고 내겠다는데요”였다.

당초 김 감독은 파티가 끝난 뒤 선수들끼리 따로 모여 술자리를 가질 수 있도록 구단에 지원을 요청해뒀다. 정규시즌 1위도 충분히 축하할 만한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수들은 자발적으로 ‘공짜술’을 키핑 해뒀다. 이날 조금 미뤄 둔 기쁨은 한국시리즈 우승 후 눈물과 함께 몸 전체로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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