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SPN 정철우기자] 2007년 SK는 ‘전원 야구’를 앞세워 전체 선수들의 고르게 기용했다. 붙박이 주전 선수가 거의 없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선발 라인업에 오르는 선수들의 얼굴과 순서가 바뀌었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정경배 이호준 최정은 거의 매일 선발로 출장했다. 이 중 정경배는 논란의 대상이 됐다.
공격력 때문이다. 정경배는 올시즌 타율이 2할3푼5리에 불과했다. 정경배의 중용으로 지난해 2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받았던 정근우는 유격수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정근우의 유격수 수비에 부족함이 많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김 감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단점을 커버하고도 남을 장점에 비중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낮은 타율은 수비에서의 효과와 높은 득점권 타율이 보완해준다 여겼다.
김 감독이 고려한 것은 정경배의 경험과 팀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었다. 정경배는 심성이 고운 선수다. 그와 삼성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이승엽(요미우리)은 “나는 이제껏 경배형이 화내는 걸 본 적이 없다”고 까지 말한 바 있다. 여기에 타고난 성실성까지 갖고 있다. 그는 김 감독의 강훈련에 단 한번도 빠진 적이 없다.
후배들은 그를 믿고 따르며 그가 잘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김 감독은 전체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SK 내야 수비진을 이끄는데 정경배만한 선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수비력도 높게 샀지만 그의 지휘 아래 젊은 내야수들이 전체적인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SK의 페넌트레이스 1위가 확정된 뒤 시즌 최종전이었던 10월6일 대전 한화전. 정경배는 이날 2타점을 추가해 타점에 걸려 있던 옵션을 극적으로 채웠다.
정작 정경배는 “난 경기에 안 나가도 된다”고 했지만 후배들은 달랐다. 어떻게든 정경배 앞에 출루하기 위해 애를 썼고 결국 타점을 올리게 되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냉정한 프로세계에서 선수들의 자발적 지원을 받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김 감독은 정경배가 팀을 앞장서서 이끄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을 묶어줄 수 있는 숨겨진 구심점이 될 수 있다고 여겼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정근우의 유격수 전환도 성공 가능성을 확실히 보여줬다. 송구나 포구에 아직 가다듬을 부분이 남아 있지만 집중력이 살아있는 유격수 수비는 큰 흠이 없었다. 특히 김 감독은 아시아시리즈가 끝난 뒤 “이번 대회서 정근우가 공격은 물론 수비까지 아주 잘해줬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정근우 수준의 타격과 주루 능력을 갖고 있는 선수가 2루수는 물론 유격수까지 해낼 수 있다는 것은 팀 입장에서 매우 큰 힘이 아닐 수 없다.
많은 지도자들은 선수의 단점을 고치기 위해 애를 쓴다. 물론 단점을 고치지 않으면 더 크게 성장할 수 없다. 그러나 단점에 집착하다보면 장점까지 묻혀버릴 수 있다.
김 감독은 “아주 도드라진 장점이 있다면 그걸 살리는 것이 우선이다. 단점 고친다고, 또 그 단점이 미워서 쓰지 않는다면 장점까지 묻힌다. 리더가 생각을 바꾸면 낭비되는 자원을 그만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장점 살리기의 백미는 2001년 신윤호다. 진흙속에 묻혀 있던 신윤호가 최고의 주가를 올렸던 해다. 당시 신윤호를 취재하며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며 불과 몇 달새 달라진 것은 분명했지만 그 원인을 알아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정작 신윤호 본인도 잘 모르고 있었다. “특별하게 달라진 건 모르겠어요. 슬라이더를 다시 배우고 있기는 한데 아주 잘 던지는 수준은 아니고...”
김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로 단번에 팀의 마무리 투수 자리를 꿰찰 수 있었지만 단순히 믿음 만으로 투수 부문 3개 타이틀(다승,구원,승률)을 거머쥔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월이 좀 더 흐르고 나니 당시 신윤호의 깜짝 활약이 조금은 이해가 됐다. 신윤호가 했던 말 중에 힌트가 있었다. 해답은 슬라이더였다.
김 감독은 2000년 말 LG 2군 감독에 취임한 뒤 신윤호에게 슬라이더를 좀 더 가다듬으라고 지시했다. 이전까지 그를 지도했던 코치들에게선 찾아보기 힘든 방식이었다.
신윤호는 공은 빠르지만 제구력이 나빠 실전에선 어려움을 겪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1994년 입단 이후 대부분 코치들은 신윤호의 제구력을 잡기 위해 공을 들였다. 그러나 신윤호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김 감독은 뜬금없이 슬라이더 장착부터 지시했던 것일까. ‘제구가 나쁘다’는 단점을 고치기 보다 ‘공이 빠르다’는 장점을 살리기 위해서다.
당시만 해도 신윤호는 타자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공이 빠른 투수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 공을 던지니 맘 놓고 타석에 서 있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김 감독은 “좀 엉성해도 스트라이크 잡을 수 있는 공 하나만 있으면 예측하기 힘든 직구는 오히려 힘이 될 수 있다. 타자에게 공포감을 줄 수 있는 투수는 그리 흔하지 않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타석에서 잔뜩 긴장하고 있을 (우)타자에게 자신의 몸에서 달아나는 슬라이더는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윤호의 슬라이더는 예리한 편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제구를 할 수 있었다. 이전까진 직구 제구 잡는데 온 신경을 쓰다보니 그나마도 써먹지 못했지만 김 감독의 역발상을 통해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스트라이크를 잡으려면 직구를 살살 던질 수 밖에 없던 그다. 그러나 슬라이더를 활용하면서 직구는 맘 먹고 힘껏 던질 수 있었다. 그동안 마운드에만 서면 심장이 벌렁거렸지만 타자는 자신보다 더 긴장하고 있음을 알게된 것도 이때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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