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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게이트 안에서 말의 돌발 행동으로 생긴 분쇄골절의 흉터를 훈장처럼 달고, 24년째 모래 트랙의 최전선을 지켜온 베테랑 유창환 과장(한국마사회 서울출발전문)은 출발선의 중압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 묵직한 책임감은 매 주말 현장의 피부로 다가온다.
가로 127m의 초대형 전광판이 불을 밝히고 수많은 관중이 환호성을 지르는 결승선 주변의 화려함과 달리, 이곳 경마장의 맨 앞바닥에는 묘한 적막이 감돈다. 경주 시작 1분 전, 예민한 말들을 위해 스피커 소리마저 음소거된 채 기수들의 거친 숨소리와 말들의 콧김만이 남는 곳. 낮 최고기온이 30도 안팎까지 치솟은 지난달 27일 본지가 찾은 렛츠런파크 서울(과천 경마장) 트랙 최전선의 풍경이다.
이처럼 경마가 1분 남짓한 질주로 판결이 나는 스포츠라면, 대중이 목격한 것은 이 거대한 시스템의 절반에 불과하다. 관람석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 지열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사각지대에는 오로지 공정하고 투명한 ‘0.1초의 시작’을 위해 500kg의 야성과 사투를 벌이는 이들이 숨을 죽이고 서 있다. 바로 한국마사회 출발관리부서의 얼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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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말을 바로 눈앞에서 접했을 때 느낀 위압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오직 달리기를 위해 개량된 500kg의 거대한 말 ‘서러브레드(Thoroughbred)’가 내뿜는 콧김과 예민한 근육의 움직임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했다. 이 거대한 동물의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 출발위원들의 주 업무다.
이 특수한 일터의 시계는 남들과 전혀 다른 궤적으로 움직인다. 마사회 직원들은 대중이 쉬는 주말 근무가 필수다. 특히 오는 8월부터는 약 5주간 매년 정례화된 ‘야간경마’ 체제로의 전환이 기다리고 있다. 이 기간 출발 부서의 타임라인은 오후 12시 출근해 밤 9시에 마감하는 한밤의 레이스로 전면 재편된다.
출발 부서의 하루는 일반 직장인들이 출근하기 전인 새벽 6시 30분, 경주마들의 훈련 조교 및 출발 심사와 함께 일찌감치 시작된다. 아무리 좋은 혈통을 타고난 말이라도 곧바로 데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철저한 심사를 거쳐 준비된 말들만이 트랙에 설 자격이 주어진다. 출발대 진입을 하지 못하거나 문이 열렸는데도 출발하지 못하면 경주 전체에 치명적인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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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건 사원(한국마사회 서울출발전문)
이 사원은 현재 현장 총괄 책임자인 ‘출발위원’이 되기 위한 양성 교육 과정을 밟고 있다.
경마일 하루 동안 이들이 소화하는 경주는 보통 10~11건에 달한다. 지방 레이스와의 교차 경주가 시행될 때는 다음 출발까지 주어지는 시간이 고작 25분에서 50분 남짓으로 좁혀진다.
이 짧은 시간 안에 살수차가 먼지를 잡고 트랙터가 모래 바닥을 고르는 정지(整地) 작업이 마무리되면 △출발위원 4명 △출발운영원 21명 △경마지원직 12명 등 총 37명이 한 팀으로 트랙 위에 배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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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위원들의 손에 쥔 경계도에는 출전 마필들의 정보가 기호로 표시돼 있다. 앞발을 들며 난동을 부리는 녀석은 ‘세모’, 진입 자체를 거부하는 녀석은 ‘동그라미’, 눈을 가리는 안대를 씌워야 하는 녀석은 ‘X’로 표시하고 있다. 자기 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악벽(나쁜 버릇)을 가진 말들과의 심리전은 치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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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창환 과장
이 때문에 새벽 트랙 뒤편에서는 철저한 헬스케어가 동시에 이뤄진다. 심폐지구력을 키우고 열을 식히기 위해 경주마 전용 수영장에서 수영을 시키는가 하면, 전용 러닝머신으로 운동을 시키고 마방에서는 적외선 찜질까지 해준다.
전력을 다해 달린 말들이 경주 후 마방으로 돌아갈 때면 목덜미가 하얀 비누 거품으로 뒤덮이곤 한다. 이는 말의 땀 속에 포함된 단백질인 ‘라테린(Latherin)’이 마찰로 인해 일어난 거품이다. 빽빽한 털가죽을 가진 말이 전력 질주 중 체온을 빠르게 떨어뜨리기 위해 선택한 진화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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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객들 앞에서 한 경주마가 세 번이나 진입에 실패해 제외된 적이 있었는데, 정말 분했습니다. 외국의 경우 그냥 아웃이지만 우리는 다음 경기에 또 마주해야 하기에 지속적으로 방법을 연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 유창환 과장
트라우마를 이겨낸 장인의 주도성
유창환 과장의 몸에 남은 분쇄골절의 흔적은 출발위원들이 매 경마일에 마주하는 직업적 숙명이다. 그는 과거 좁은 게이트 안에서 말이 돌발행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팔이 완전히 꺾이는 중상을 입었다.
칼을 대고 뼈를 조각조각 이어 붙여야 했던 대수술보다 두려웠던 건, 예민한 동물을 다시 마주해야 한다는 트라우마였다. 유 과장 역시 지난 2023년 잠시 타 부서로 발령이 나며 트랙을 떠나기도 했지만 단 3주 만에 다시 출발선으로 복귀했다. 사고의 기억이 생생한 게이트 앞으로 그를 다시 이끈 건, 이 고독한 경기를 ‘내 손으로 책임진다’는 장인의 주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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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말이 게이트에 진입하고 신호 버튼을 누르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3~4초. 기계적인 결함이나 돌발 상황으로 문이 단 0.1초라도 늦게 열리면 그 경주는 즉시 무효(출발 불성립)가 된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출발선에서 200m 전방에 대기하던 직원 2명이 황색 깃발을 흔들어 기수들에게 경주 무효 신호를 보내야 한다. 이는 100여 년간 전 세계 경마장이 공통으로 차용했던 방식이다. 이를 위해 이들은 매일 깃발을 흔들고 가상 상황을 토론하는 훈련을 반복한다.
이 출발선에서 흘리는 땀방울은 마사회 직원들만의 몫이 아니다. 한 경기를 끝내고 나면 말은 보통 10~15kg의 체중이 고스란히 빠져나간다. 말 위에 탄 기수들의 자기관리도 잔인할 정도로 엄격하다. 기수들은 당일 경주의 부담중량을 맞추기 위해 52kg이 넘으면 출전이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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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수분들은 극단적인 소식과 체중 조절 스트레스를 평생 견뎌야 합니다. 가족들과 마음 편히 저녁 식사를 같이 해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죠. 정년까지 버티는 분들은 타고난 체질에 평생 소식을 실천하는 가혹한 절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 유창환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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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경마장은 사행성 편견이 짙은 공간이었다. 돈을 잃은 고객들이 “말 고개가 돌아갔는데 왜 신호 버튼을 눌렀느냐”며 출발 부서에 날 선 원망을 쏟아낼 때가 현장의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이다.
말의 고개가 돌아가는 것은 인간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동물의 돌발 행동이지만, 흥분한 고객들은 쉽게 수긍하지 않는다. 출발 부서가 철저한 매뉴얼과 투명성에 집착하는 이유다.
경마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한국마사회 모든 직원은 단 100원의 베팅도 법적으로 원천 금지돼 있다. 이 엄격한 금기는 이들이 모래판 위에서 수호하는 공정함의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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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 중장년층이 중심이던 관람석에 MZ세대 연인들과 가족 동반 고객의 발길이 눈에 띄게 늘며 공간의 색채가 컬러풀하게 바뀌는 모양새다.
꼭 거액을 걸지 않더라도 최소 100원부터 참여할 수 있어, 젊은이들은 커피 한 잔 값으로 소소한 유희를 즐긴다. 초대형 전광판에 배당률과 함께 경주마들의 역동적인 질주가 펼쳐지면 관람석은 여느 프로 스포츠 경기장 못지않은 응원 열기로 가득 찬다.
34만 평의 수려한 녹지 공간이 삭막한 도박장이 아닌, 시민을 위한 개방형 레저 공원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풍경이다.
단 0.1초, 불가역의 세계
출발 업무는 한 번 흘러가면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不可逆)’의 세계다.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현장에서 단 한 번의 실수는 대형 사고나 경주 무효로 이어질 수 있다. 이에 직원들이 짊어지는 정신적 피로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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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건 사원
0.1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일터는 이들의 일상마저 엄격한 강박으로 규율한다. 경마일 전야(前夜)에 내려지는 전원 금주령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동건 사원의 경우, 항상 일정한 시간에 잠자리에 드는 것은 물론 근무 전날에는 매운 음식이나 튀긴 음식 같은 자극적인 식단부터 차단한다. 사소한 속 쓰림조차 현장의 집중력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경계심, 언제든 ‘90점 이상’의 완벽한 컨디션을 출력해 내려는 철저한 루틴의 결과다.
경마일 일정이 모두 끝나면 출발 부서에는 비로소 깊은 안도감이 찾아온다. 경주를 마친 말들이 마방으로 이동할 때, 경마공원 내부 도로에는 독특한 규칙이 켜진다. 수의 차량을 비롯한 모든 작업 차량이 일제히 시동을 끄고 말이 지나갈 때까지 숨을 죽이는 것. 철저히 ‘말이 우선’인 경마장만의 오랜 규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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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를 트랙 위에 묻어두고 다시 새 모래판을 마주하는 회복 탄력성. 이는 전국 단 10명뿐인 출발위원들과 미래의 출발위원을 꿈꾸는 이들이 이 고독한 최전선을 지켜내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결승선의 화려한 조명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들이 흘리는 땀방울은, 역설적으로 경마장을 찾는 이들에게 가장 안전하고 투명한 스릴을 선물하는 밑거름이 된다. 24년 차 베테랑 유창환 과장과 양성 과정을 밟고 있는 이동건 사원이 입을 모아 “편견을 지워달라”고 당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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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건 사원
모든 화려한 레이스의 앞선에는 언제나 공정한 시작이 존재한다. 언제나 ‘90점 이상’의 일정한 생체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전날 밤 매운 음식까지 끊어내는 출발 부서의 철저한 자기 통제. 이 고독하고 정밀한 강박이 버티고 있기에, 수만 명의 환호성은 오늘도 모래 트랙 위에서 안전하게 지속된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사각지대에서 묵묵히 시스템의 정확성을 설계하는 사람들. 화려한 결승선의 뒤편, 경마장 최전선에는 오늘도 가장 투명한 ‘0.1초의 신호’를 출격시키는 출발팀의 진짜 땀방울이 흐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