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이 흐른 지난해, 이번에는 서울시향 대표로 유럽 클래식계의 문을 두드렸다. 80년 가까이 유럽 명문 악단들이 개막 무대를 지켜온 ‘프라하 봄 국제 음악 축제’에 서울시향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직접 프라하를 찾아 예술감독과 프로그램 디렉터를 만난 뒤 초조하게 답을 기다렸고, 돌아온 것은 기대 이상의 ‘개막 공연 초청’이었다. 비유럽권 오케스트라로는 80여 년 축제 역사상 처음이다. 체코의 역사와 자연, 민족적 정체성을 담은 ‘나의 조국’ 전곡을 연주한다는 점도 상징적이다. 정 대표는 “예전처럼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한국에 어떤 연주자가 있는지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한국 클래식의 위상이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서울시향이 유럽에 깃발을 꽂기 위해 출발한다. 오는 22일 출국해 25일부터 31일까지 스페인 산세바스티안 쿠르잘 오디토리움과 이탈리아 메라노 쿠르하우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를 차례로 도는 유럽 순회공연에 나선다. 이번 유럽행은 단순한 해외 공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오랫동안 유럽 악단들이 주도해온 세계 클래식 음악의 중심부에서 한국 오케스트라가 입지를 넓혀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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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계에서 유럽의 벽은 특히 높다. 흔히 ‘세계 3대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빈 필하모닉(1842년 창단), 베를린 필하모닉(1882년), 로열 콘세르트헤바우 오케스트라(1888년) 등 유럽 명문 악단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바탕으로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기준을 만들어왔다. 1948년 출발해 올해 78년 차인 서울시향에는 그만큼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단순히 연주력만 뛰어나다고 그 틈을 파고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랜 시간 축적한 고유의 음색과 합주 전통, 지휘자와의 호흡은 물론 음반과 해외 공연 실적, 국제 음악계의 신뢰가 쌓여야 비로소 세계적인 악단으로 인정받는다.
서울시향도 오랜 시간 이 벽을 넘기 위해 공을 들여왔다. 2005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뒤 정명훈 전 음악감독 시절부터 해외 투어와 음반 제작을 본격화했다. 뉴욕 카네기홀 공연을 비롯해 해외 무대 경험을 쌓았고, 세계적인 클래식 음반사 도이체 그라모폰(DG)과 아시아 오케스트라 최초로 장기 녹음 계약도 맺었다. 2024년에는 뉴욕 필하모닉과 홍콩 필하모닉을 이끈 얍 판 츠베덴이 음악감독으로 취임했다. 빈 필과 베를린 필 출신 연주자들을 비롯한 정상급 음악가들과 꾸준히 협업하면서 해외 음악계의 평가도 달라졌다.
서울시향의 변화 뒤에는 지난 30여 년간 차곡차곡 쌓인 K클래식의 성취도 있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우뚝 선 조성진은 지난해 독일의 권위 있는 클래식 음악상 ‘오푸스 클라시크’에서 ‘올해의 기악연주자상’을 받았고, 올해는 임윤찬이 같은 상을 거머쥐었다. 정명훈은 지난해 라 스칼라 247년 역사상 첫 아시아 출신 음악감독에 선임됐고, 진은숙은 올해 프라하 봄 국제 음악 축제 상주 작곡가로 위촉됐다.
K클래식의 높아진 위상은 서울시향의 유럽 진출에도 힘을 보탰다. 정 대표가 지난해 직접 현지에서 프라하 봄 참가 의사를 전한 뒤 서울시향에 대한 높은 평가와 츠베덴 음악감독의 국제적 명성이 더해지면서 논의는 빠르게 진전됐다.
개인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세계 무대에서 존재감을 키워온 K클래식은 이제 오케스트라로 보폭을 넓히고 있다. 서울시향의 이번 유럽 순회공연과 내년 프라하 봄 개막 공연은 그 흐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무대다. ‘변방의 필’에서 세계 음악계의 한 축으로, 서울시향이 그 문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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