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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설이 시간이 유독 길었던 것은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즉흥적이고 장황한 연설 스타일도 있지만, 여러 ‘쇼맨십’을 곁들인 연출이 이뤄진 것도 한몫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 도중 불법체류자에 희생당한 소녀의 이름으로 야생동물 보호구역 명칭을 바꾼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뇌암 투병 중인 13세 소년을 초청해 명예 경호원으로 임명하며 감동적인 순간들을 연출하려고 애썼다.
전임자인 조 바이든 전 대통령 때리기도 이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 바이든 전 대통령의 이름을 직간접적으로 16번이나 언급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을 “최악의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가 하면, 최근 폭등하고 있는 계란 가격 상승까지도 바이든 전 대통령의 탓으로 돌리는 등 전임자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미 언론들은 현직 대통령이 첫 의회연설에서 전임자 때리기성 발언을 쏟아낸 건 이례적이라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은 1기 땐 ‘모든 미국인’에 집중했다면 이번엔 통합 메시지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지난해 대선 유세를 떠올릴 만큼 ‘공화당 지지층’을 결집하는 메시지를 던지는 데 집중했다. 트랜스젠더 운동선수에 대한 비판, 대규모 연방 예산 삭감에 대한 찬사, 사회보장제도 사기 의혹 제기 등 보수와 진보층을 분열시킬 가능성이 큰 논쟁거리가 가득한 발언으로 채웠다.
그중에서도 트럼프 행정부 실세로 떠오른 일론 머스크 정부효율부(DOGE) 수장을 콕 집어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치켜세웠다. 머스크는 DOGE를 통해 연방정부의 대대적인 인력 감축과 계약 삭감을 진두지휘하며 트럼프 행정부의 정부 축소 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 일을 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렇게 해주고 있어 정말 감사하다”고 말하자 머스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다.
단정해진 머스크의 패션도 눈길을 끌었다. 최근 백악관 방문 때 검은색 ‘마가(MAGA)’ 모자와 티셔츠를 착용했었던 머스크가 이날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등장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 당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정장을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논란이 불거진 것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양당 의원들은 패션으로 정치적 메시지를 드러냈다. 낸시 펠로시 전 미 하원의장과 민주당 여성 의원들은 분홍색으로 옷을 맞춰 입고 트럼프 정책이 여성들에게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행정 권한 확대를 반대하는 민주당 의원들은 검정색 티셔츠에 ‘이 곳에 왕은 없다’, ‘왕도 없고 쿠데타도 없다’고 적힌 문구를 내보이기도 했다. 또 파란색과 노란색이 섞인 넥타이나 노란색 블라우스와 파란색 재킷을 착용해 우크라이나를 향한 지지의 뜻을 보인 민주당 의원들도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평소 공화당을 상징하는 붉은색 넥타이를 즐겨 하지만, 이날은 붉은색과 푸른색이 섞인 보라색 체크 무늬 넥타이를 선택했다. 정치권에서 혼합된 색상은 초당적 협력을 의미한다.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식 당시 맨 보라색 넥타이 스타일을 재현하는 등 약간의 실험을 하고 있지만 그의 연설 자체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체크 무늬 넥타이가 단순한 넥타이일 뿐임을 분명히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 연설 도중에 하원의원이 항의하다가 퇴장당하는 초유의 사태도 불거졌다. 민주당 소속 알 그린 텍사스주 하원의원이 자리에 일어서 갖고 있던 지팡이를 흔들며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미국의 공공의료 보험인 메디케이드를 삭감할 “권한이 없다”고 고함을 쳤다. 결국 그는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의 질책을 받은 뒤 경호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의사당 밖으로 쫓겨났다. 공화당 의원들은 “미국(USA)”을 외치며 힘을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