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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트라우마: 돈은 지켰지만, 노후는 잃어버렸다[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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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기자I 2026.07.29 11:3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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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의 파산 공포가 만든 퇴직연금 제도
돈 불리는 통장 아닌 가둬두는 금고 만들어
연 수익률 2%대...성장 없는 팽창만 계속
자본시장에 투자해 스스로 불어나도록 해야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1997년의 겨울을 직접 기억하시거나, 혹은 교과서나 미디어를 통해 ‘IMF 외환위기’라는 이름으로 그 시절의 혹독한 추위를 접해보셨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 가장 혹독했던 겨울 중 하나였던 그해,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쓰나미가 우리 삶을 덮쳤습니다. 멀쩡하던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문을 닫았고, 평생을 바쳐 일했던 가장들이 거리로 내몰렸습니다.
IMF의 트라우마: 돈은 지켰지만, 노후는 잃어버렸다[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
당시 수많은 직장인이 겪었던 실제 이야기 중 하나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대기업 부장이었던 김 선배는 회사 파산 소식을 듣고 짐을 싸 나오면서도 마지막 희망 하나는 붙들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20년 동안 흘린 땀의 대가인 퇴직금이 있으니, 이걸로 당분간 버티며 새로운 길을 찾아볼 수 있겠지.” 하지만 그 희망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회사의 금고는 이미 텅 비어 있었고, 회사의 빚을 받아내려는 은행과 채권자들이 남은 자산을 모두 가져간 뒤였습니다. 법적으로 받을 권리가 있었던 퇴직금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습니다. 회사가 망하면 내 평생의 노후 자금도 함께 공중분해된다는 사실은, 당시 대한민국 직장인들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공포로 각인되었습니다.

공포가 만든 설계도 — ‘수익’보다 ‘안전’

이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2005년, 정부는 ‘퇴직연금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제도 도입의 제1원칙은 명확했습니다. “회사가 망하더라도 근로자의 퇴직금은 안전하게 지키자.” 이를 위해 회사가 퇴직금을 사내에 쌓아두던 관행을 금지하고, 의무적으로 금융기관이라는 ‘외부 금고’에 돈을 맡기도록 강제했습니다. 회사가 부도나도 금융기관에 있는 내 돈은 건질 수 있으니까요.

이것은 분명한 진보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트라우마의 함정’이 숨어 있었습니다. IMF의 공포가 너무 컸던 나머지, 우리는 제도를 설계할 때 오직 안전에만 몰두했습니다. “원금만 지키면 된다, 절대 손해 보면 안 된다.” 이 강력한 방어 기제는 퇴직연금을 ‘돈이 불어나 연금이 나오는 통장’이 아니라 ‘돈을 가둬두는 강철 금고’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금고 속에 갇힌 20년

그로부터 2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 퇴직연금 전체 적립금의 80% 가까이는 은행 예금처럼 원금과 약속된 이자만 쥐어주는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꽁꽁 묶인 채 잠들어 있습니다. 주식이나 채권 펀드처럼 시장 성과에 따라 자산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는 ‘실적배당형’ 상품의 비중은 고작 20% 수준에 불과합니다. 연금 선진국인 미국과 호주는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퇴직연금 자산의 80% 이상을 실적배당형 상품에 실어 적극적으로 돈을 굴리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낳은 결과는 숫자로 뚜렷하게 증명됩니다. 최근 10년간 한국 퇴직연금의 매년 평균(연환산) 수익률은 2% 수준에 불과해,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상승률과 비슷했습니다. 사실상 돈이 늘어난 게 아니라 제자리걸음을 하며 물가에 가치가 깎여 나간 셈입니다. 반면 같은 10년간 국민연금은 연평균 7% 가까운 수익률을 냈고, 호주의 퇴직연금(슈퍼애뉴에이션)은 연 8%, 스웨덴의 연금기금(AP7)은 연 13%대를 기록했습니다. 원금에 이자가 붙고 그 이자가 다시 새 이자를 낳는 ‘복리의 힘’이 작동한 결과, 다른 나라 근로자의 노후 자산이 몇 배씩 불어나는 동안 우리의 퇴직연금은 물가 뒤꽁무니를 쫓기 바빴던 것입니다.

더 아이러니한 사실이 있습니다. 지난 10년간 퇴직연금 적립금은 연평균 13~15%씩 늘어났습니다. 언뜻 보면 눈부신 성장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증가분은 대부분 기업이 법으로 정해진 부담금을 매년 새로 쏟아부은 ‘현금의 유입’이었을 뿐, 투자로 불어난 ‘자산의 증식’이 아니었습니다.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성장 없는 팽창”이라 부릅니다. 몸집은 커지는데 체력은 늘지 않는 셈이지요. 만약 이 거대한 자금이 세계 연기금 평균 수준인 연 6%대로만 운용됐어도, 매년 10조 원 이상이 근로자들의 노후 자산으로 추가로 쌓였을 것이라는 추산도 있습니다.

안전의 역설

여기서 우리는 역설과 마주합니다. IMF가 남긴 진짜 공포는 ‘회사가 망해서 돈을 떼이는 위험(신용위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외적립이라는 제도로 이 위험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은 또 다른 위험인 ‘시장이 흔들리는 위험(시장위험)’까지 막아버렸습니다. 문제는 그 대가로 맞이한 것이 바로, 가장 조용하지만 가장 치명적인 위험 — ‘물가에 잠식당해 노후가 가난해지는 위험(구매력위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의 위험을 막으려다 더 큰 위험 앞에 무방비로 서게 된 것, 연금 학계에서는 이를 안전의 역설(Paradox of Safety)이라 부릅니다. 원금을 지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원금을 지키는 진짜 이유인 노후를 지키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이제 그 금고를 열어야 합니다

IMF가 남긴 교훈은 “돈을 안전하게 지키라”는 것이었지, “돈을 썩히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20년간 돈을 ‘보관’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 돈을 ‘운용’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이제 인정해야 합니다. 회사가 망하는 것만 위험이 아닙니다. 100세 시대에 돈 없이 오래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크고 오래가는 위험입니다. 이 위험을 막으려면 퇴직연금을 가둬둔 저 차가운 금고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이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지켜주는 의사결정 체계(거버넌스) 안에서 자본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스스로 땀 흘려 일하며 불어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금고 문을 열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거대한 장벽과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안전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정작 그 문을 열고 나갈 열쇠조차 우리 손에 쥐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왜 근로자들이 그 금고 문을 열고 나가지 못한 채, 여전히 ‘선택의 감옥’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는지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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