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8월 18일 아서 보니파스 미 육군 소령이 한국에서 아내 마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다. 보니파스 소령은 편지에서 공동경비구역(JSA) 경비 임무를 설명하면서도 “당신과 아이들이 고국에서 안전하게 지내고 있어 정말 다행”이라고 적었다.
정확히 1년 뒤인 1976년 8월 18일, 보니파스 소령과 마크 배럿 중위는 JSA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중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숨졌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다.
사건 발생 50년을 맞은 18일 경기 파주시 캠프 보니파스에서 두 장교를 기리는 추모식이 열렸다. 보니파스와 배럿의 유가족, 스콧 윈터 유엔군사령부 부사령관, 한미 JSA 경비대대장인 차민호·마이클 베이커 중령,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문환 예비역 소령 등 130여명이 참석했다.
보니파스 소령의 장녀 베스 보니파스는 최근 발견한 아버지의 편지를 소개했다. 그는 “아버지를 여윈 지 50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며 “우리가 아버지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은 편지와 친구, 전우들이 나눠준 기억을 통해 보존돼 왔다”고 말했다.
보니파스 소령의 둘째 딸 메건 디코어는 “아버지가 전사했을 때 고작 세 살이어서 기억의 대부분은 사진 속 모습뿐”이라며 “아버지를 더 알아갈 기회가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아버지가 자랑스럽고, 그의 유산을 지켜준 한국군과 미군에 깊이 감사한다”고 했다.
손주인 브래디와 딜런 디코어 남매도 할아버지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읽으며 알게 된 그의 모습을 전했다. 편지 속 보니파스 소령은 자녀들에게 어머니를 돕고 친구들과 잘 지내라고 당부하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그러나 부하 장병의 안전과 관련해서는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않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사건 발생 두 달 전인 1976년 6월 아내에게 “지금까지는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느님, 부디 이 상태가 계속되게 해달라. 그것이 내 진정한 목표”라고 적었다. 손주들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 가운데 하나에서 근무하면서도 할아버지의 가장 큰 관심은 다른 사람들의 안전이었다”고 말했다.
긴급 일정으로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제이비어 브런슨 유엔사령관의 추모사는 윈터 부사령관이 대독했다. 브런슨 사령관은 “세상은 수많은 면에서 변했지만 비무장지대(DMZ)의 근본적인 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며 “평화는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지키고 쟁취해야 하며, 때로는 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취약한 조건”이라고 밝혔다.
이어 “이곳의 임무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매일 수행되는 위험하고 필수적인 임무”라면서 “한국과 미국, 국제 파트너들은 외교의 최전선이자 침략에 맞서는 최후의 방어선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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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파스 소령과 배럿 중위가 숨진 미루나무 터에는 장병 17명이 도열했다. 미측 부사관의 지휘에 따라 두 장교의 계급과 이름이 각각 세 차례씩 울려 퍼졌다.
당시 보니파스 소령과 배럿 중위는 유엔사 초소 사이의 시야를 가리던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는 작업을 감독하고 있었다. 북한군 경비병 30여명이 갑자기 작업 인원을 공격했고, 약 4분간의 충돌로 두 장교가 숨지고 다수의 한미 장병이 다쳤다.
한미는 사흘 뒤 전 병력을 비상경계 태세에 두고 미루나무를 제거하는 ‘폴 버니언 작전’을 전개했다. 유엔사는 이를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최대 규모의 무력시위로 평가하고 있다. 잘려나간 미루나무 자리에는 현재 두 장교를 기리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배럿 중위의 유가족인 스테이시 애덤스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이 두 사람을 기억하고 정성을 다해 추모한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두 사람의 희생은 한국을 지키고 북한의 침략을 막는다는 공동의 목표 아래 한미를 더욱 굳게 묶었다”며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평화에 도달하기를 바란다. 두 나라의 협력이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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