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이상윤(65·가명)씨는 이른바 ‘마스크 구매 대란’이 일었던 당시 모습을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시도 때도 없이 마스크를 찾는 사람이 들이닥치고, 약국에 재고가 떨어져 마스크를 사지 못한 사람들이 이씨에게 짜증을 냈던 기억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씨는 “3월 한 달 동안 고생을 가장 많이 했고, 그 이후엔 그나마 괜찮았다”며 “손님들이 고생한다고 말해주시는 것만으로도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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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 달 넘게 공적 마스크 판매처 역할을 해 온 약국이 무거운 짐 같았던 그 역할을 내려놓는다. 정부가 보건용 마스크에 대한 공적 공급을 폐지하는 내용의 긴급 수정조치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오는 12일 이후부터 소비자들은 보건용 마스크를 약국뿐만 아니라 마트나 편의점, 온라인 쇼핑몰 등 다양한 판매처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다.
사상 초유의 마스크 대란 속에서 마스크를 시민에게 직접 공급했던 약사들로선 정부의 ‘공적 마스크 제도 폐지’ 조치에 후련하다는 반응을 먼저 내놓았다. 마스크 수요와 비교해 공급량이 현저하게 모자라던 지난 3월, 마스크를 사러 온 이들로 약국 앞이 아수라장이 됐던 기억 탓이다. 당시엔 아침마다 약국 앞에 긴 줄이 늘어서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했다.
서울 동작구의 한 50대 약사 최모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초기엔 마스크 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면서 “약국 문에 ‘마스크가 없다’고 써 붙여도 하루에 수십명씩 들어와 마스크를 살 수 있는지 물어봤다”고 말했다. 약사 A씨도 “약국으로 ‘마스크 재고가 있느냐’는 전화가 계속 와서 선을 뽑고 싶었던 적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약사를 향해 폭언, 폭행하는 등 ‘약국 난동’도 잇따랐다. 이씨는 “마스크가 없다고 욕을 들은 약사도 여럿 있다고 들었다”며 “재고가 없어 못 파는 것뿐인데 주변에서 모욕당하는 걸 들으니 착잡했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약국 직원에게 ‘마스크를 달라’고 낫을 들고 협박하거나 욕설과 고함으로 약국 업무를 방해한 이들이 각각 경찰에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아울러 일부 약사들은 공적 마스크 판매 제도가 계속 바뀌면서 약사들이 해야 하는 역할이 늘어났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고객 주민번호를 써넣고, 판매 개수에 맞게 마스크를 재포장 하는 등 업무가 가중됐다는 것이다. 서울 영등포구의 약사 박모(43)씨는 “혼자 약국을 운영하는데, 마스크 손님이 몰리면 한동안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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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팔면서 곤란하고 불편한 상황을 겪었지만, 약사 대부분은 이 같은 과정에서 보람도 느꼈다고 입을 모았다. 약사 최씨는 “마스크 몇 개 팔았을 뿐인데, 저희에게 고맙다고 하시는 분들을 보면 오히려 제가 감사했다”면서 “직원들과 함께 고생도 했지만, 그만큼 약사로서 사회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약사 박씨 역시 “몇몇 시민이 약사들에게 불평하거나 폭행을 하는 등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지만, 다수 시민은 약국이 마스크를 판매하는 데 신뢰를 보내줬다고 믿는다”면서 “코로나19 사태와 같은 국가적 위기 속에서 약국이 공적인 역할을 보여줄 수 있어 보람을 느꼈다”고 밝혔다.
정부도 코로나19 사태 속 약사들의 역할에 감사함을 드러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7일 ‘공적 마스크 판매 제도’를 중단하기로 하면서 “마스크에 대해서는 소회가 많다”며 “전국의 약사들이 봉사의 마음으로 공적 마스크 보급에 크게 기여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대한약사회에 감사장을 발송할 것을 지시하기도 했다.
한편 공적 마스크를 판매한 약사들의 경제적 손실 등에 대해 합당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박홍근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올해 1년간 약국에서 판매한 공적 마스크에 대해 소득세와 부가가치세를 비과세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조세특례제한법 일부개정법률안’을 지난달 발의했다. 현재 이 법안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