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미양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은 “여성혐오범죄는 각종 여성폭력방지법에도 불구하고 개별 법률로 포섭되지 못하고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며 “여성혐오범죄에 관한 정확한 규명과 연구, 실효적 정책과 법제 정비가 미비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여성혐오범죄 판례 동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주제로 발제를 맡은 이경하 여변 인권이사는 “혐오범죄의 범행 당시 또는 전후로 드러난 여성에 대한 적개심, 성차별적 신념을 포함한 여성혐오가 정신질환의 문제로만 축소, 접근되는 일부 판례 동향에 우려스러운 지점이 존재한다”며 여성 폭력이 범주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양형 규정에 대해 해외 사례를 비교 분석했다.
이 이사는 “미국의 경우 1994년 혐오범죄 가중처벌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가해자의 범행 이유가 편견에 기반한 경우 의무적으로 선고형을 세 단계 이상 상향하도록 한다”며 “31개 주에서 혐오범죄를 가중처벌 대상으로 규정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영국은 범행동기 수사단계에서 여성혐오가 범죄를 저지르는데 주요 동기가 됐는지 의무적으로 기록해야 하는 법안이 2021년 영국 상원을 통과했고, 또 지난 8월 영국 정부는 극단적 여성혐오범죄를 ‘테러’로 규정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혐오범죄 동향 분석과 방지책 마련을 위한 통계 수집이 되고 있지 않은 점도 지적됐다. 이 이사는 “미국 연방은 1990년 지방 경찰기관으로부터 혐오범죄 관련 데이터를 수집해 공표하도록 규정하는 혐오범죄통계법을 제정했다”며 “반면 우리나라는 여성혐오범죄에 대한 정확한 규명과 연구, 실효적인 정책 및 법제 정비를 촉구하는 시민사회의 요청에도 아직 여성혐오범죄의 범주를 유형화해 관련 통계를 구축, 관리하는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실정”이라고 짚었다. 국내에선 지난 20대 국회에서 증오범죄 통계 집계 법안이 마련됐으나 폐기됐고, 현재는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 상태다.
|
이 이사는 “개별 법률로 포섭되지 않는 유형의 여성혐오범죄는 여전히 여성폭력 범주의 사각지대에 있어 피해자 지원과 보호 역시 입법 공백 상태”라며 여성혐오범죄를 유형화하고 통계를 구축할 것을 제언했다. 또 여성혐오 동기를 가중처벌 규정으로 신설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날 간담회에선 차별과 혐오의 금지 명문화 필요성도 제기됐다. 여성 혐오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특정 집단의 혐오와 차별 금지 규정이 확대돼야 한단 것이다.
전윤정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여성폭력 대응과 구제절차, 사법절차 등에서 범행의 동기와 내용을 파악해 여성혐오범죄에 대해 공식적으로 명명하고 수사당국의 적극적인 수사와 처벌이 이뤄져야한다”면서도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 여부, 성적지향, 학력,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과 혐오를 금지·예방하는 입법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박상민 한국여성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도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특별하게 다루는 것은 오히려 집단 간의 갈등을 유발·심화시킬 가능성을 내포할 수 있다”며 “여성혐오 외에도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 역시 중요한 문제로 다뤄져야 한다”고 첨언했다. 그러면서 “강력한 법정형을 규정하는 손쉬운 방식보다는 건강한 공동체 속에서 소통과 공감을 통해 차별과 혐오를 해결하려는 사회적 노력이 요구된다”고 지적했다.
류수정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여성혐오와 혐오범죄는 차별과 깊은 관련이 있고, 이와 관련해서는 혐오표현 대응과 차별금지법 제정도 오랫동안 논의 중에 있다는 사실도 환기하고 싶다”며 “차별과 혐오에 선을 긋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함께 마련한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또 여성혐오범죄가 여성혐오·폭력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으며, 관련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문제도 생긴다고 지적하며 “여성에 대한 구조적 폭력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