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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니혼게이자이(닛케이)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라이벌인 고노 다로 행정개혁담당상을 꺾은 기시다의 일생을 조명했다. 어린 시절 뉴욕에서의 경험은 기시다가 정치인을 꿈꾼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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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돌아온 기시다는 최고 명문 도쿄대 합격자를 다수 배출하는 명문 카이세이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도쿄대에는 가지 못했다. 삼수 끝에 와세다대에 입학한 기시다는 일본 장기신용은행에 입사했다. 1980년대 중반 이뤄진 플라자 합의로 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하는 장면을 목격한 기시다는 다시금 정치에 뜻을 두게 된다. 결국 은행 입사 5년 뒤인 1987년 그는 아버지인 중의원 기시다 후미타케의 비서로 정계에 발을 들였다.
그가 자민당 총재 자리를 노린 건 지난 2018년 선거에서였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요 파벌의 지지를 받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존재감이 큰 터였다. 기시다는 아베 전 총리의 당선을 예감하고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서 출마를 포기했다.
이후 2020년 아베 전 총리가 건강 악화를 이유로 임기를 1년 남긴 채 사퇴 의사를 밝히면서 기시다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듯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아베 전 총리의 뒤에서 묵묵히 2인자로 일하던 스가 총리가 자민당 내 7개 파벌 중 5개 파벌의 지지를 얻으며 당선이 확실시된 탓이다. 여기저기에서 “기시다는 이미 끝났다”는 얘기가 나왔다.
신중하던 기시다가 달라진 건 이때부터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주변에서 “나라가 어수선할 때에는 총재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자제하라”는 우려섞인 당부가 나왔지만 기시다는 개의치 않았다. 총재 경선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계속 편 것이다. 당시 기시다는 스가 총리에 이어 2위로 낙마했다.
일본 100대 총리 선거에서 기시다가 내세운 건 ‘관용의 정치’이다. 출마를 선언하며 기시다는 “지금 시대에 요구되는 리더십은 자신이 하고싶은 일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내가 올바르다고 국민을 무시하는 정치도 아니다. 다양한 목소리를 받아들이는 관용의 정치”라고 주장했다. 닛케이는 “찬반이 갈리는 판단을 할 때면 반드시 양측 의견을 듣고 결단을 내리며, 한 번 결정하면 흔들리지 않는 리더십이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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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다 역시 미일관계를 중심으로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 간 외교를 주축으로 하는 아베 외교 노선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다만 “북핵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국과의 관계를 재구축해야 한다”며 자민당 내부에서도 아시아·태평양 외교를 강조하는 파벌인 고치카이를 계승하고 있어, 장기적으로는 한일 관계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