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년에 딱 한 달, 초록 바람이 부는 배추능선 안반데기

정기영 기자I 2020.09.15 15:33:34
[이데일리 트립 in 정기영 기자] 이곳의 여름은 푸르름과 초록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넓은 초록이 끝없이 펼쳐져 허리를 조금 숙이면 가로, 세로의 초록 줄이 리듬을 타듯 규칙적이다. 일 년 중 딱 한 달. 8월의 초록 바람을 즐길 수 있는 안반데기로의 여행은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에서부터 시작된다. 평창과 강릉의 자연은 경계가 모호하다. 들머리, 날머리가 행정구역상으로 평창과 강릉의 경계를 오가며 겹치는 곳이 많은데 안반데기도 그런 곳 중 한 곳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끝난 지 2년이 넘었지만 횡계리 시내는 지금도 올림픽을 준비하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시내를 흐르는 송천을 따라 계곡을 거슬러 오른다.



왕복 2차선의 도로는 어느새 넓은 1차선의 도로로 바뀌고 도로 옆으로 나란히 흐르던 송천은 도로 아래 계곡이 되었다. 낙석 지대를 통과하고 급경사의 도로를 오르는 긴장감에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초보 운전자라면 뒷덜미에 땀 좀 흐르는 길이다. 꼬리를 이어가는 차량 중 하나로 올라온 도로에서 드디어 한쪽으로 주차된 차들을 만났다. 안반데기다. 차량으로 손쉽게 해발 1000m에 오를 수 있으니 여름날 이곳의 인기는 뒤엉킨 차량만으로도 짐작케 한다. 숨고르기를 위해 카페에 들러 시원한 아이스커피부터 마셨다. 카페의 통 창 너머로 보이는 배추밭을 보니 그제야 눈이 시원하다.

안반데기는 대개 피덕령 멍에전망대를 다녀오는 것으로 끝내지만 이번 걸음은 카페에서 보이는 옥녀봉 일출전망대로 오르는 길을 택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적은 곳에서 이곳 풍경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신종 코로나 19로 인해 비대면 언택트 여행이 대세인 요즈음, 야외에서도 조심해서 나쁠 리 없다. 일출전망대로 바로 오르는 길은 급경사인 탓에 완경사로 오른다. 햇살은 뜨겁지만 해발 고도가 1,000가 넘는 곳이니 바람만 살짝 불어도 시원함과 서늘함에 소름이 살짝 돋는다. ‘이곳의 여름은 바람막이 점퍼가 필수다’라는 것을 제대로 체험하는 중이다. 긴 장마의 꿉꿉한 여운이 바람에 의해 말끔히 날아간 듯 가볍다.

오르면서 잠시 멈추고 돌아보니 피덕령 멍에전망대쪽의 초록이 다르다. 검푸른 초록이다. 식생활이 바뀌면서 김치를 담구는 포기배추의 수요가 줄고, 샐러드 등을 해먹는 양배추의 수요가 늘어난 탓에 이곳의 풍경 색이 바뀌는 중이다. 아직도 대부분은 포기배추 밭이지만 이 풍경도 언제 변할지 모를 일이다. 경사 40~50도의 돌만 있던 황무지 땅. 고단한 삶의 사람들이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두 손으로 밭을 만들었고, 먹거리를 키워내며 살겠다던 의지는 여름을 대표하는 풍경이 되었다. 바튼 비탈 능선에 수 십 명의 사람들이 곡예 하듯 한쪽 다리에 힘을 빡 주고 줄을 서서 일하는 모습은 삶의 억척이리라.

홍수 같던 긴 장마에 행여 경사진 배추밭이 유실되지 않았을까 했던 조바심은 예쁘게 자라는 배추를 보니 안심이다. 파도를 치듯 구비를 이루는 배추밭의 두둑은 일정한 간격으로 V자, 1자, 사선의 골을 만들어 물을 가두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만들었다. 한 포기, 두 포기, 세 포기.. 배추를 따라 가는 눈길의 끝은 어김없이 하늘이다. 농로 사이로 바이크족이 지나가는 것을 보니 문득 젊은 혁명가 체게바라의 젊은 시절을 그린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떠올랐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모습과 오토바이 뒤에서 폴폴 날리는 먼지가 영화의 포스터와 오버랩 되었던 탓이다.

이르게 심은 배추는 속이 꽉 차 한 포기 뽑아 그 자리에서 먹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 배추밭을 따라 농로가 있으니 어느 길을 선택해서 걸어도 이곳에서 가장 높은 곳인 풍력발전기 쪽으로 오르게 된다. 가파른 포장길이 햇살에 달궈져 뜨거울 만도 하건만 뜨거움보다 시원함이 앞선다. 바람 언덕이 있는 곳이라면 사람들이 두 팔을 올리고 서서 바람을 맞는 폼새가 여름을 털어내는 몸짓이겠다. 초록을 가르는 길. 마치 천에 곱게 실로 박음질을 한 것처럼 유려하기 그지없다. 이마에 흐르는 땀은 여름이라는 핑계일 뿐, 이곳까지 오르면서 완만한 길을 따라 올라온 덕분에 힘들지 않다.

떡을 칠 때 쓰는 통나무 받침판처럼 생겼다고 해서 안반데기라 불리지만 다 같은 초록이 아니다. 배추밭 능선이 끝나는 곳은 산으로 이어졌고, 산이 끊어진 곳에서는 배추밭이 이어졌다. 초록 속에서 마을 주민들이 농번기 때만 지낸다는 빨간색 농막은 이곳을 더 예쁘게 만드는 포인트이다. 간혹 배추밭에서 일하는 분들을 보고 있자면 그 중 1/3은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지나가며 눈 맞춤과 함께 인사를 하면 오히려 쑥스러워하면서 작게 되받아 치는 그들의 이국에서의 삶이 팍팍하지 않기를. 한여름 딱 한 달의 풍경이 달력의 사진이 되는 곳, 구름이 놀다간다는 ‘운유길’의 새벽을 기대하며.

[여행 Tip]

안반데기는 흔히 강릉에서 진입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수도권에서 가자면 횡계리 방향에서 진입하는 게 쉽다. 횡계리 방향에서는 10월 말까지 진입이 가능하며, 이후에는 기후 여건상 진입이 불가능하다.

안반데기 카페에서 가벼운 음료 판매한다. 마을에는 식당이 없으므로 횡계 시내 식당을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횡계리에는 오삼불고기 거리가 조성돼 있으므로 식당 선택이 용이하다. 횡계칼국수에서는 두툼한 오징어와 삼겹살의 씹는 맛이 일품인 오삼불고기와 칼국수를 맛볼 수 있어 좋다. 50년 전통인 개성집은 대관령 황태덕장의 산물인 명태로 칼칼한 명태찜을 내고 있어 손님들에게 반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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