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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으로 ‘고개 세우기’ 등 적극조치 불가능
2019년 전 남편 살인범 고유정의 이른바 ‘커튼머리’로 인해 얼굴 공개를 매우 손쉽게 피해 갈 수 있다는 점이 확인되자 경찰은 2021년 1월 공보규칙을 개정해 “필요한 경우 수사과정에서 취득하거나 피의자 동의를 얻어 촬영한 사진·영상물 등을 공개할 수 있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이에 따라 2021년 신원이 공개된 흉악범 10명 중 9명은 취재진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 신원공개 결정 즉시 신분증 사진이 외부로 공개됐다. 하지만 당시에도 먼저 공개된 신분증 사진과 이후 공개된 실물과 너무 큰 차이를 보여 논란이 됐다. 신분증 사진 공개로는 신상을 공개하는 제도 취지를 살리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이번 이기영 사례에서도 같은 논란이 반복됐다.
이에 따라 신분증 사진이 아닌 피의자 체포 후 수사기관에서 촬영하는 ‘머그샷’을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2021년 12월 신상이 공개된 흉악범 10명 중 전 여친 가족 살해범 이석준의 경우 신분증 사진이 아닌 머그샷이 공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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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중후반 연쇄살인범도 신상공개 피해
검사 출신 한 변호사는 “신상공개 찬반은 논외로 일단 시행된 제도인 만큼 제대로 운영을 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며 “구속력이 약한 경찰 규칙이 아닌 법률 개정을 통해 신상공개 피의자 머그샷을 강제적으로 공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흉악범 신상정보는 2000년대 초반까지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1990년대 중반까진 피의자는 검거 직후 언론에 공개돼 기자들과 문답을 주고받았다. 심지어 피해자 신상까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던 중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설립된 후 피의자 인권 보호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커지며 조금씩 피의자 신상정보를 공개하던 관행도 사라졌다.
그리고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력 사건 수사 당시 경찰의 피해자들에 대한 인권 침해가 거센 파문을 일으키며 ‘인권 수사’ 요구가 빗발쳤다. 다음 해 인권위의 피의자 경찰 호송 관련 제도의 개선 권고에 따라 경찰이 피의자 신원 노출 금지 조항을 담은 인권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을 제정함에 따라 이때부터 피의자 신상은 철저히 가려졌다.
2000년대 중후반 흉악범 신상을 전혀 공개하지 않다가 잇딴 연쇄살인범의 등장에 피의자 신상공개 여론이 들끓었다. 연쇄살인범 정남규·강호순 등의 신원마저 공개되지 않으면 여론이 폭발하자 2010년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2011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개정으로 6대 강력범죄와 성범죄에 대해 신상정보의 근거 조항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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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공개에 대한 사회적 찬반 논란이 뜨거운 상황에서 결국 신상정보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공개하도록 했다. 강력범죄의 경우 법률에 대략적 기준을 적시한 후 ‘피의자 인권을 고려해 신중하게 결정하고 남용해선 안 된다’는 조항도 함께 명시했다. 이를 근거로 만든 경찰수사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은 제정 당시 ‘얼굴을 공개할 때엔 얼굴을 드러내 보이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해선 안 되며, 얼굴을 가리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방식으로 행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경찰 규칙에 따라 피의자가 신상공개 후 처음으로 취재진 앞에 서는 검찰 송치 시 경찰관들은 얼굴을 공개하지 위한 적극적 행동을 할 수 없다. 1980~90년대처럼 범인 호송 과정에서 기자들이 범인 얼굴을 잘 촬영할 수 있게 얼굴을 잡는 등의 행동이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다.
일부 피의자들은 취재진 앞에서 얼굴이 공개되지 않기 위해 온갖 수를 썼다. 2019년 3월 신상공개 후 검찰 송치 과정에서 점퍼에 얼굴을 뭍은 채 고개를 푹 숙여 정수리만 찍혔던 노부부 살인범 김다운이 대표적이다. 경찰로서도 법적으로 ’적극적 조치‘가 불가능해 이를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얼굴 일부가 보였던 김다운과 달리 같은 해 5월 전 남편을 잔혹하게 살해해 신상이 공개된 고유정의 경우 취재진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고개를 숙여 긴 머리가 얼굴 전체를 가리는 ’커튼 머리‘를 통해 철저하게 얼굴 공개를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