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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가입: "관성을 노후 자금으로 바꾸는 마법"[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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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기자I 2026.09.22 11: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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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2012년부터 자동 가입 의무 단계적 확대
공적연금기금 'NEST' 설치해 민간시장 사각지대 해소
한국, 의무화 돼 있지만 사업자가 신청 안하면 유명무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함께 고지·징수하는 시스템 도입해야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사장님, 저희도 퇴직연금 가입 안 하나요? 옆 공장 친구는 가입했다던데…” “아유, 김 대리. 은행 가서 서류 쓰고 하려면 복잡해. 수수료도 나간다잖아. 나중에 내가 퇴직금 섭섭지 않게 챙겨줄 테니까 걱정 말고 일이나 해.”

중소기업 현장에서 흔히 벌어지는 대화입니다. 김 대리는 불안합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내 퇴직금도 날아가는 건 아닌지 걱정되지만, 사장님이 “복잡하다”며 손사래를 치는데 더 이상 따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퇴직연금의 사각지대입니다. 근로자가 원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도입의 키를 쥐고 있는 사업주가 행정 업무의 부담과 비용 때문에 도입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업주와 근로자를 계속 설득할 것이 아니라, 가입이 기본값이 되도록 시스템을 바꾸라”는 역발상으로 문제를 해결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영국입니다.

2005년 영국, “설득은 실패했다” — 터너 보고서

2000년대 초반, 영국은 심각한 연금 위기에 빠져 있었습니다. 고령화는 빨라지는데 기업들은 비용 부담을 이유로 연금 도입을 꺼렸고, 국민들의 노후 준비는 비어 있었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캠페인을 해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블레어 총리는 금융 전문가 아데어 터너 경에게 해법을 요구했습니다. 3년의 연구 끝에 2005년 발표된 ‘터너 보고서’는 고령화 사회에서 연금 재정을 지킬 방법이 셋 중 하나뿐이라고 못박았습니다. 급여를 깎아 더 가난해지거나, 수급 연령을 높여 더 오래 일하거나, 아니면 더 많이 저축하거나. 그리고 세 번째 방법을 국가가 강제하는 대신 ‘부드럽게 개입’해서 실현하라고 제언했습니다. “기업의 선의나 개인의 결심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가입하는 쪽이 기본값이 되도록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이것이 행동경제학의 ‘넛지(Nudge)’ 이론을 제도화한 ‘자동 가입(Auto-enrollment)’의 탄생 배경입니다.

NEST의 기적 — “고르지 않으면, 이곳으로 옵니다”

이 보고서는 2008년 연금법 제정으로 이어졌고, 영국은 2012년부터 대기업을 시작으로 자동 가입 의무를 단계적으로 적용했습니다. 이때 함께 등장한 핵심 장치가 NEST(National Employment Savings Trust)입니다. 앞서 잠시 예고했던, 한국의 ‘공공개방형’과 가장 닮은 공적 연금 기금입니다. 영국 제도에서 사업주는 일정 요건을 갖춘 근로자를 적격 연금제도에 자동으로 가입시켜야 합니다. 민간 사업자를 고를 수도 있지만, 영세 사업장이나 저소득 근로자를 민간 시장이 반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NEST가 필요했습니다. NEST는 어떤 사업주가 신청하든 받아주는 공적 수용처로 설계되었습니다. 사업주 입장에서는 “받아줄 곳이 없어서 못 했다”는 핑계가 사라진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정교한 장치가 더해졌습니다. 첫째, 22세 이상이고 일정 소득 이상인 근로자는 자동 가입 대상이 됩니다. 현재 기본 구조는 근로자 4%, 사용자 3%, 정부 세제혜택 1%를 더해 총 8%가 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가입을 거부하면 사용자와 정부가 보태는 몫까지 함께 포기하게 되니, “거부하면 내가 손해”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습니다. 둘째, NEST에는 ‘공적 서비스 의무’가 있습니다. 어떤 사업주가 어떤 규모로 가입을 신청하든 받아주어야 합니다. 민간 금융사가 “돈이 안 된다”며 외면하기 쉬운 영세 사업장까지 떠안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법으로 맡긴 것입니다. 이 구조로 NEST는 1,200만 명이 넘는 가입자를 확보했고, 이 규모의 힘으로 세계적인 자산운용사들과 경쟁 입찰을 벌여 수수료를 낮췄습니다. 자동 가입은 선의에 기대던 시장을 기본값과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시장으로 바꾸었습니다.

국민연금은 하는데 퇴직연금은 못 하는 이유

이제 한국을 돌아봅시다. 많은 분이 “퇴직연금 가입이 의무화된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맞습니다. 법적으로는 2022년부터 신설되는 모든 사업장에 가입 의무가 부과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영세 사업장이 미가입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국민연금과 비교해보면 그 이유가 명확해집니다. 우리가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시작하면, 며칠 뒤 어김없이 집으로 ‘국민연금 납부 통지서’가 날아옵니다. 내가 신청하지 않아도 국가는 내 소득을 파악해서 “당신은 가입되었으니, 얼마를 내시오”라고 통보합니다. 안 내면 독촉장이 날아옵니다. 이것이 진짜 ‘자동 가입’입니다. 반면 퇴직연금의 의무화는 다분히 ‘선언적’입니다. 법에는 “가입하라”고 쓰여 있지만, 사업주가 은행에 제 발로 찾아가기 전까지 국가는 아무런 고지서도 보내지 않습니다. 국민연금이 국가가 “찾아가는 서비스”라면, 퇴직연금은 사업주가 “찾아가야 하는 서비스”입니다. 이 행정 시스템의 차이가 바로 사각지대를 만드는 주범입니다.

법적 문턱을 넘어 ‘일단 태우는’ 시스템으로

그런데 영국식 자동 가입을 한국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치명적인 문턱이 있습니다. 현행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은 계속근로기간 1년 미만이거나 주 소정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근로자를 퇴직급여제도 설정 대상에서 아예 제외하고 있습니다. 이 법적 제외 규정과 자영업자·플랫폼 노동자 같은 미가입층을 합치면, 정확한 산출 근거가 검증된 숫자는 아니지만 전체 취업자의 약 64%에 달한다는 추산이 나올 만큼 사각지대는 거대합니다.

자동 가입(Opt-out)의 진정한 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휘됩니다. 단순히 법령에서 1년/15시간 제외 규정을 삭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단 소득이 발생하는 모든 근로자를 기본값(Default)으로 자동 가입시킨 뒤, 예외적인 경우에만 사후적으로 입증해 입금을 유예(Opt-out)하는 방식”으로 행정 시스템을 뒤집어야 합니다. 법적 문턱을 낮추는 것과 일단 시스템 안으로 태우는 자동 가입은 별개의 순서가 아니라, 사각지대를 부수는 하나의 수레바퀴입니다.

국가가 지정한 ‘디폴트 계좌’로 고지서를 보내라

이 선행 과제를 해결한 다음에는, 한국도 용기를 내야 합니다. 단순히 법전에 “의무”라고 적어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국민연금처럼 강력한 행정력이 뒷받침된 자동 가입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사실 한국에도 이미 이 방향의 씨앗은 있습니다.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 이른바 ‘푸른씨앗’입니다. 푸른씨앗은 민간 금융기관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30인 이하 중소기업을 위해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하는 공적 퇴직연금기금입니다. 이 점에서 영국 NEST와 닮아 있습니다. 받아주는 곳이 없어서 퇴직연금을 못 한다는 문제를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공적 수용처인 셈입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푸른씨앗은 신청하면 받아줍니다. 그러나 국가가 먼저 사업장을 찾아내 “당신은 여기 가입되어 있고, 이만큼을 내면 됩니다”라고 고지해 주지는 않습니다. 국민연금은 국가가 소득을 파악하고 고지서를 보내지만, 퇴직연금은 여전히 사업주가 움직여야 제도가 작동합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는 분명합니다. 사업주가 민간 금융기관과 퇴직연금 계약을 맺지 않았다면, 국가는 해당 사업장을 자동으로 푸른씨앗 같은 공적 기금에 연결된 것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4대 보험 징수 시스템을 활용하여, 국민연금 보험료를 걷을 때 퇴직연금 부담금도 함께 고지하고 징수해야 합니다. 물론 사업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영국처럼 정부가 비용을 보태주는 매칭 구조를 함께 도입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제도 안으로 들어오고, 벗어나려면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시스템.” 이것이 국가가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넛지이자, 힘없는 근로자를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복지입니다.

가입의 문제를 해결했다면, 이제 남은 것은 운용의 문제입니다. 사람을 제도 안으로 태웠더라도, 그 안의 돈이 예금에 멈춰 있거나 가입자가 수많은 상품 앞에서 다시 선택을 미룬다면 연금은 충분히 자라지 못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생애주기형 자동운용의 대표적 수단, TDF(Target Date Fund)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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