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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1789년 10월 5일 깊은 밤. 프랑스 파리의 어느 좁은 골목에서 한 여인이 아홉 살 난 딸의 손을 꼭 쥔 채 마차에 오른다. 거친 옷을 입고 머리에는 두건을 쓴 채 그림도구가 든 최소한의 짐만 들었다. 누구든 그 얼굴을 알아본다면 곧장 군중의 손에 잡혀 단두대에 서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여인을 태운 마차가 어둠 속에 사라진 뒤 날이 밝자 파리의 군중은 베르사유로 행진해 왕과 왕비를 궁 밖으로 끌고 나오는 사건이 벌어졌다. 부르봉 왕가의 마지막 운명이 멱살 잡혀 끌려 나오던 바로 그 전날 밤, 마리 앙투아네트(1755∼1793)의 전속화가였던 엘리자베스 루이즈 비제 르 브룅(1755∼1842)은 필사의 도주를 선택한 것이다.
르 브룅은 누구인가.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빈의 미술사박물관에서, 또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익히 보아온 앙투아네트의 초상들, 그러니까 장미를 든 왕비, 모슬린 드레스를 입은 왕비, 자녀와 함께 있는 왕비 등의 모습은 모두 르 브룅의 손끝에서 나왔다. 앙투아네트의 전속화가로 일하던 11년 동안 왕비를 그린 초상화만 30점을 넘긴다. 바로 18세기 프랑스 화단의 가장 중심부에 있던 여성 화가였던 것이다.
정규 미술교육 길 막혀 있던 시절…선천적 재능으로 명성
르 브룅은 1755년 파리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파스텔 초상화가였고 어머니는 미용사였으니, 가정 형편은 어디로 보나 넉넉할 수 없었다. 딸의 재능을 알아봤던 아버지마저 르 브룅이 열두 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불과 3∼4년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르 브룅이 아버지 대신 그림을 그려 돈을 벌게 된 것이다. 중산층과 하급 귀족의 주문을 받아 그린 그림은 “어린 천재 여성 화가가 있다더라”는 입소문을 타고 파리 사교계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열아홉 살이 되던 1774년, 무허가 영업이란 이유로 화실의 그림 도구를 압수당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같은 해 르 브룅은 화가동업조합인 생-뤼크 길드에 가입함으로써 합법적 영업 자격을 확보할 수 있었고, 그 자격증을 쥔 채 남성 화가가 그득한 파리의 그림 주문 시장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1776년, 르 브룅은 결혼을 한다. 화상인 남편 장-바티스트 피에르 르 브룅은 도박으로 아내의 수입을 끊임없이 탕진해버린, 결코 좋은 배우자라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의도치 않게 르 브룅에게 안겨준 한 가지 선물이 있었으니, 화상이란 직업 덕에 생긴 ‘집 안의 미술관’이 그것이었다. 루벤스, 반 다이크, 렘브란트 같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거장들의 작품을 가까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규 미술교육의 길이 막혀 있던 르 브룅에게 거장들의 작품을 코앞에서 볼 수 있게 한 환경은 그의 화력을 키우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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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아네트는 어머니에게 보낼 자신의 초상을 여러 화가에게 의뢰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딸의 초상화를 재촉하는 어머니에게 이런 편지를 쓸 정도였다. “제 닮은꼴을 포착해내는 화가를 아직도 찾지 못했다는 것이 정말 괴롭습니다. 화가들이 저를 절망하게 만듭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근친혼으로 인한 유전병으로 턱이 길고 아랫입술이 튀어나온 외양을 물려받았고, 앙투아네트의 얼굴에서도 그런 특징이 보였다. 결함을 숨기다 보면 닮지 않은 그림이 나오고, 그대로 그리다 보면 아름답지 않아 보일 수밖에 없었던 터다. 이런 가운데 르 브룅이 기가 막힌 방식으로 앙투아네트의 초상을 그려냈으니, 결함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눈길이 더 가는 곳을 강조하는 식이었던 것이다.
르 브룅은 왕비의 투명한 피부와 총명한 눈빛에 화면의 에너지를 집중시켰다. 안색의 광채와 살아 있는 눈빛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구조를 만들어 얼굴의 단점이 주변으로 자연스럽게 밀려나도록 했다. 손에 들린 장미 한 송이, 왕관 옆 장미 꽃다발이 얼굴빛과 같은 톤을 가지면서 조화를 만들어냈고, 보색을 이루는 테이블보와 커튼은 인물의 자태를 압도하지 않고 받쳐주는 역할을 하게 했다. 결과적으로 이 초상은 앙투아네트의 공식적 위엄과 인간의 생기를 동시에 달성했다. 앙투아네트와 이 초상을 전달받은 어머니 테레지아는 비로소 만족했다.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는 친구는 될 수 없었으나, 앙투아네트는 르 브룅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초상화를 그리는 시간 동안 함께 이중창을 즐겨 불렀다고 전해진다. 왕비의 총애에 힘입어 르 브룅은 성공 가도를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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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망명생활 12년 동안 유럽 모든 궁정서 그림 의뢰
이제 다시, 1789년 10월의 그 밤으로 돌아가 보자. 누가 알아볼까 두려워 얼굴을 숨기고 마차에 오른 르 브룅은 한 달쯤 뒤 이탈리아 로마에 도착했다. 도주한 망명자의 신분이었지만 르 브룅은 앙투아네트의 화가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당시 유럽 귀족들은 프랑스 문화에 매혹돼 있었고, 덕분에 프랑스 왕비의 화가였다는 꼬리표는 오히려 르 브룅이 다시 살아갈 길을 터줬다. 망명의 12년 동안 그는 유럽의 거의 모든 궁정에서 그림을 의뢰받았다.
1801년 마흔여섯 살이 된 르 브룅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지만 자신이 알던 세계는 이미 없었다. 다만 혁명기에 공공에 개방된 루브르 궁전이 미술관이 됐다는 것을 알고, 홀로 찾아가 왕가의 소장품이던 거장들의 작품을 오랜 시간 감상했다. 만년에 이르러 르 브룅은 자신의 일생을 글로 남겼다. 1835년부터 1837년에 걸쳐 발간된 세 권의 ‘회상록’이 그것이다. 그 한 대목에서 르 브룅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은 내 안에 타고난 것이다. 그 열정은 결코 식은 적이 없으니, 아마도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진 까닭일 것이다. 오늘에 이르도록 나는 그 모든 매혹을 그대로 느끼며 부디 이 신성한 열정이 내 생명과 더불어서야 끝나기를 바란다.”
이전의 영광을 회복할 수는 없었고 유행이 지난 화가를 찾는 발길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르 브룅은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고, 초상화 662점, 역사화 15점, 풍경화 200여 점을 남겼다. 8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르 브룅의 묘비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곳에서, 마침내, 나는 쉬노라.’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넘어지고 도망가고 되돌아오는 길고 거친 여정을 마친 르 브룅에게 ‘마침내’라는 말만큼 합당한 작별의 표현이 또 있을까.
△이윤희 미술평론가는…
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