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트립in 심보배 기자] 남도로 내려가기 하루 전 날, 나는 스무살 꽃다운 청춘처럼 설다. 알람소리에 맞춰 봄나들이 준비를 마치고, 새벽을 깨운 사람들과 화엄사로 향했다. “봄이여 와라,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네게로 갈게.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도록!”
작은 간절함은 2018년 화엄사에서 새롭게 피고 사무친다. 사찰여행은 2017년 6월 기점으로 나에게 다른 의미가 되었다. 이곳에 와서야 깨닫는다. 그리움으로 남아있는 엄마가 생각나는 장소라는 걸. 지난해 해인사 백련암에 엄마의 49제를 모셨다. 그날 이후 사찰은 그리운 장소가 되었다. 이제는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러나 각황전 부처님 앞에 서자 한 순간 내 안으로 엄마가 들어왔다. 두 손을 모으고 엄마의 평안을 기도 드렸다. 어느새 마음이 온통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차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발걸음이 저절로 인적 드문 각황전 옆으로 향했다.
각황전 뒤는 동백꽃 군락지다. 2년 만에 보는 동백. 눈으로 보고, 손끝으로 만지니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 가슴이 저린다. 시골집 앞마당에 엄마가 가꾸던 동백나무. 혹독한 겨울 이기고, 피고 지기를 거듭한 동백은 송이째 떨어진다. 마치 아무런 예고 없이, 가장 행복해야 할 어버이날, 우리 곁을 떠난 엄마처럼. 동박새도 어디론가 날아갔다. 활짝 핀 화엄사 동백도 떠날 채비를 하듯 곱디고운 빛깔이 아니다. 툭. 툭. 툭. 마지막이 아쉬웠던 걸까? 누군가 떨어진 동백을 모아 하트무늬를 만들어 놓았다. 나는 먹먹해지는 마음을 부여잡고 떨어진 꽃송이를 주워 듬성듬성한 하트를 채우며 늘 현재진행형이었던 당신에게 안부를 묻는다. “엄마, 사랑해요, 잘 지내시죠?”
봄날 화엄사를 대표하는 꽃은 홍매화다. 카메라를 든 여행자들이 활짝 핀 붉은 매화를 찾는다. 고개 들어 까치발로 사진을 찍다가 아쉬워한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다. 동백은 지천인데 매화는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몇 송이만 피었다. 홍매화는 동백이 다 피고 질 때를 기다리는 걸까? 동백이 다음 주인공인 매화를 위해 송이를 떨구듯이 산사의 자연은 그렇게 서로를 위하며, 긴 시간을 함께했으리라. 홍매화 활짝 핀 날이라면 오늘 활짝 핀 동백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운 엄마를 다시 불러오지 못했겠지. 사찰은 오래 머물고 싶지만 마음 둘 곳 없어 서성이는 나를 꽃으로 위로해 주었다.
화엄사는 대웅전, 각황전 두 건물을 동등하게 부각하며 조화를 이룬다. 이 아름다운 사찰도 전각과 전각이, 피는 꽃들이, 싹을 틔우는 나무들이 조화롭지 않았다면 300년의 시간을 지켜올 수 있었을까? 나는 화엄사 돌계단에 앉아 지금의 나를 돌아본다. 화엄사의 꽃들처럼 때를 알고 그 자리를 지키는지, 지금의 나는 잘 살고 있는지, 철들지 않은 내 마음을 꺼내 본다.
화엄사에 두고 온 바람과 그리움. 홍매화가 활짝 필 때 웃으며 다시 찾으리라. 그때의 화엄사는 부처님 품처럼 머물고 싶은 곳이 되어있겠지. 지금도 빛나는 내 청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