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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허가받지 않은 불법 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진 이 여사가 1980년 12월 수도경비사령부 계엄 보통군법회의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지 41년 만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대학생의 시국 성토 농성과 노동자 집회에 참석해 시위를 벌인 행위는 시기, 목적, 동기, 결과 등에 비춰볼 때 이는 1979년 12월 12일부터 1980년 5월 18일을 전후해 발생한 헌정파괴 범죄에 대항해 시민이 전개한 민주화운동”이라며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에 해당해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이 여사는 1980년 5월 4일 500여명의 대학생들이 고려대 도서관에서 연 시국 성토 농성에 참석해 청계피복노동조합의 결성 경위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해 연설을 했으며, 닷새 뒤인 9일에는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노총회관에서 금속노조원 600여명과 함께 ‘노동3권 보장’과 ‘동일방직 해고근로자 복직’ 등의 구호를 외치며 집회를 한 혐의를 받았다.
이번 재판은 지난 4월 검찰이 1980년대 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처벌받은 민주화 운동가 5명에 대한 직권 재심을 청구하면서 열리게 됐다. 앞서 검찰은 지난달 25일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씨 상중에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반대한 정당행위”라며 이 여사에 무죄를 구형했다. 이번 재심을 담당한 안준석 북부지검 형사5부 검사는 이날 선고 후 기자와 만나 “옛날 판결문을 바탕으로, 당시 제반 사정을 기반으로 종합해서 재기소에 이르게 된 사건으로 무죄 판결이 속속 이뤄지고 있다”며 “관련 증거기록이 남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까운 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71)씨는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어머니는 소외된 노동자와 함께했다”며 재심 결정과 판단이 “역사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날 이 여사의 선고가 이뤄진 서울북부지법 402호 법정은 고인이 된 이 여사(1929∼2011) 대신 노트북을 든 기자들이 방청석을 가득 채웠다. 예고한 재판 시간에 등장한 홍 부장판사는 판결문을 읽었으며, 선고 이유부터 주문 낭독까지 단 1분 만에 끝났다.
이 여사의 차남인 전씨는 이날 뒤늦게 도착해 법정 밖에서 취재진으로부터 재판부의 무죄 선고를 전해들었다. 전씨는 취재진과 만나 “다시 한 번 이 나라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시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왔지만, 계엄군이 왜 어머니를 전국에 지명수배하고 군사재판을 했는지에 대한 한마디 언급 없이 1분여 만에 선고가 끝나 아쉽다”며 “가슴이 미어지는 심정”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시민단체는 41년 만에 이뤄진 이 여사의 명예회복에 “늦었지만,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전두환심판국민행동은 선고 뒤 북부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북부지검의 41년 만의 재심청구는 매우 고무적인 사건이지만, 너무 뒤늦은 감이 있다”며 “군사법정에서 이뤄진 불법재판에 의한 피해자들이 아직도 구제받지 못하고 있어 이들의 명예회복, 피해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태일 재단은 성명서를 통해 “무죄 판결은 이소선 어머니 한 분에 그쳐서는 안 된다”며 “이 땅의 모든 전태일과 이소선에게 국가의 이름으로 사죄하기를 사법당국에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