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파탄에 '변화' 택한 아르헨…'극우'로 위기 돌파할까

이소현 기자I 2023.11.20 16:07:57

'아르헨 트럼프' 밀레이 당선…아웃사이더의 대역전
좌파 포퓰리즘 '페론주의' 심판…8년 만 '정권교체'
아르헨 유권자들 "잃을게 없어…덜 부패하길 바랄 뿐"
달러화 도입·중앙은행 폐쇄 공약…외교 '대변화' 예고

[이데일리 이소현 기자] 140%가 넘는 고물가 등 최악 경제난을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 민심은 변화를 택했다. 19일(현지시간) 치러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 결선투표에서 ‘극우’ 하비에르 밀레이(53) 후보가 당선되며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1970년대까지 한때 부자 나라였던 아르헨티나는 수십 년째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고, 국민들의 불만이 이번 대선에서 표심으로 분출한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으로 아르헨티나 기성정치를 장악해온 ‘페론주의’ 집권당을 심판한 격이다. 중남미에서 좌파 정권이 들어서는 제2차 핑크타이드(분홍물결)가 끊어진 아르헨티나는 우경화로 정책 대전환이 이뤄질 전망이다.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인이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후 지지자들에게 연설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아르헨 트럼프’ 아웃사이더 정치인의 대역전극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이날 아르헨티나 대선 결선투표에서 99.28% 개표가 이뤄진 가운데 말레이 후보는 55.69% 득표율로, 44.31%의 표를 얻은 집권당의 세르히오 마사(51)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밀레이는 심각한 경제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신속한 조치를 약속했다. 그는 “오늘 아르헨티나의 재건이 시작된다”면서 “19세기에 자유경제로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의 잃어버린 번영을 되찾겠다”고 당선 포부를 밝혔다.

밀레이가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대역전극의 연속이었다. 2021년부터 하원의원을 지냈지만 정치적 존재감은 거의 없는 ‘아웃사이더’에 불과했던 그는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로 불리며 기성정치권에 대한 민심 이반을 등에 업고 혜성처럼 등장했다.

예비선거에서 깜짝 1위를 차지하며 돌풍을 일으키더니 본선투표에서는 마사 후보에게 밀려 예측불허의 선거 양상을 보였다. 그러다 1·2위 후보 맞대결로 치러진 이날 결선투표에서 결국 대권을 거머쥐었다.

애초 결선투표 전에는 박빙의 대결을 벌일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으나 밀레이는 11%포인트 이상의 큰 격차로 따돌리고 승리했다. 연간 140%가 넘는 인플레이션과 국민 10명 중 4명이 빈곤층인 아르헨티나 국민이 변화를 원하는 절박함이 반영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아르헨티나의 경제 상황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 올해 10월 기준 연간 물가 상승률은 142.7%를 기록했다. 중앙은행 설문조사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은 연말 185%까지 달할 것으로 예상한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보 하비에르 밀레이가 전기톱을 들고 유세하고 있다.(사진=AFP)


◇과격한 공약에도…경제 위기에 변화 열망 큰 아르헨 국민

이번 대선은 ‘차악’을 선택하는 선거였다는 평가도 나온다. 유권자들은 두 후보 중 어느 누구에게도 완전히 납득하지 못한 가운데 투표를 해야 했다고 로이터통신은 짚었다.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마사 후보는 아르헨티나 현대 정치사를 장악한 ‘페론주의’ 정치인이자 현 정부 경제장관으로서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페론주의는 후안 도밍고 페론 전 대통령을 계승한 정치 이념으로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원조로 꼽힌다.

밀레이는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달러로 대체하는 달러화 도입, 중앙은행 ‘폭파’(폐쇄) 등 다소 과격한 공약을 내세웠다. 특히 ‘전기톱 퍼포먼스’로 대변되는 정부지출 대폭 삭감, 장기 매매 허용, 지구 온난화 이론 배격 등으로 선거 기간 내내 논란의 중심에 섰다.

결국 경제위기에 대한 분노가 변화로 인한 두려움을 이겼다고 워싱턴포스트(WP)는 평가했다. 실바나 카발레리(58)씨는 뉴욕타임스(NYT)에 “부정부패에 계속 투표할 수 없다”며 “밀레이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덜 부패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밀레이에 투표한 토마스 리모디오(26)씨도 WP에 “수년간 이런 정부를 겪어왔고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며 “우리는 잃을 게 없다”고 했다.

다만 대선 공약처럼 급진적 변화를 이끌어내기엔 정치·경제적 여건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가 소속된 자유전진당은 상원에서 72석 중 7석, 하원 257석 중 38석만 차지하고 있는 등 지지기반이 약한 편이다.

19일(현지시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하비에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 당선자가 결선 투표에서 승리하자 지지자들이 환호를 보내고 있다. (사진=로이터)
◇ 아르헨 ‘극우 정권’ 선택…친미·반중 외교로 바뀌나

아르헨티나에서 극우를 포함한 우파 후보의 집권은 2015년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 이후 8년 만이다. 2000년대 초반 남미를 휩쓸던 핑크 타이드가 마크리 전 대통령 당선 이후 한풀 꺾였던 것처럼, 밀레이도 최근의 중남미 좌파 정부 집권 흐름에 변화를 꾀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보수진영에선 최근 몇 년간 선거 패배로 주춤했던 전 세계 극우의 승리라는 평가도 나온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자신이 만든 소셜미디어 ‘트루스소셜’에서 밀레이의 당선에 대해 “당신이 매우 자랑스럽다”며 “당신은 나라를 되돌리고 아르헨티나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 ‘브라질의 트럼프’로 불려 온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브라질 대통령도 “남미에 희망이 다시 빛날 것”이라고 했다. 억만장자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X(옛 트위터)에 “아르헨티나의 번영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썼다.

중남미의 정치안보 지형을 비롯해 미·중 관계에도 변화가 이뤄질지 주목된다. 밀레이는 이미 후보 시절 “대통령에 당선되면 미국과의 협력 체계를 더 공고히 다질 것”이라며 대미 외교 강화를 공언했다. 반면 중국에 대해선 “공산주의자들과 거래하지 않을 계획”이라며 ‘손절’을 공언한 만큼, 중남미 블록의 대외 노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지난 8월 승인을 받아 내년 1월 예정인 브릭스(BRICS·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 가입도 철회할 가능성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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