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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재판은 지난 2월 5일 열린 공판 이후 약 2개월 만에 열린 공판이다. 양 전 대법원장 등이 지난 2019년 기소된 후 120여 차례에 걸쳐 공판이 이어졌으나 혐의가 47개에 달하는 만큼 아직 1심 선고가 나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지난 2월 법관 인사에서 재판부가 전면 교체됐다. 재판부 교체로 이날 공판에선 새 재판부가 검찰의 공소 요지를 듣고 이에 대한 변호인단 의견을 확인하는 등 공판 갱신 절차를 진행했다.
특히 이날 양 전 대법원장은 이례적으로 피고인석에서 일어나 직접 진술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진술한 것은 2019년 5월 첫 공판 이후 처음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바뀐 재판부를 향해 “이른바 적폐청산이라는 광풍이 사법부를 할퀴고 지나갔다. 광풍이 불어닥칠 땐 판단이 마비되지만, 할퀴고 난 뒤 잔해만 남은 상태에서 뒤돌아보면 객관적으로 그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있다”며 “자칫 형성된 예단이 (재판부의) 객관적 관찰을 방해하는 것을 가장 염려하는 바이다”고 밝혔다.
양 전 대법원장은 그러면서 “얼마 전 검찰 고위 간부가 모종의 혐의로 수사받자 수사심의위원회 소집을 요구하며 ‘수사상황이 시시각각 유출되고 수사관계인에 의해 수사 결론이 계속 제시되고 있는 상황에서 공정한 수사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다”고 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언급한 검찰 고위 간부는 채널A 기자의 강요미수 사건에 연루 의혹을 받고 있는 한동훈 검사장으로 해석된다.
양 전 대법원장은 한 검사장의 사례에 빗대어 “오늘 이 법정에서 심리하는 이 사건이야 말로 당시 수사과정이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며 “그 과정에서 모든 정보가 왜곡되고, 변론이 재단돼 사회에선 마치 저 사람들이 직무수행 과정에서 상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젖어들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끝으로 “이제 광풍이 할퀴고 지나간 자국을 보면서 객관적으로 왜 이렇게 됐는지 살펴야 할 상황에서도 과거의 예단이 객관적이고 정확한 판단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을 매우 걱정한다”며 “모쪼록 새로운 재판부가 그런 상황을 잘 고려해서 정확하게 판단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날 양 전 대법원장 측은 기존과 마찬가지로 검찰이 공소장 일본주의(검사가 공소를 제기할 때 법원에 공소장만 제출하고 기타 서류·증거물은 첨부해선 안 된다는 원칙)를 위배했고, 공모 관계 역시 명확하게 기재하지 않아 공소 자체를 기각해달라 재판부에 요청했다.
양 전 대법원장 측 변호인은 “종전 재판부가 일본주의 위반 원인이 되는 부분에 대해 변경을 요구했으나 여전히 위반 내용이 남아 있고, 이미 법관의 심증은 오염됐다”며 “공소사실에서도 직권남용의 여러 공범을 나열할 뿐 누구의 직권남용인지도 명시돼 있지 않고 특정이 안 돼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개별 혐의에 대해서도 전면 무죄를 주장했다. 법원행정처와 대법원장 사이에 일반적인 업무상 보고체계가 존재하지 않고 대법원장의 결재가 필요하지 않은 업무가 대부분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앞서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기소된 전·현직 판사 중 처음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이민걸 전 실장과 이규진 전 위원과의 공모관계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변호인은 양 전 대법원장과 이 전 위원이 공모해 헌법재판소 내부 정보를 파악토록 지시한 혐의에 대해 “헌재 내부 사건 정보 및 동향 수집 지시가 위법이라는 게 검찰 생각인데, 기본적으로 이를 지시한 것은 이 전 위원이다”며 “양 전 대법원장은 헌법 관련 업무 맡은 이 전 위원에게 잘해보라고 덕담한 것 밖에 없다”고 반박했다.
이밖에 각종 재판개입 혐의에 대해서도 대법원장에겐 일선 법관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없어 직권남용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취지로 무죄를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