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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는 배낭: 어렵게 지킨 돈이 하루 만에 사라지는 이유[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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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 기자I 2026.08.13 06:3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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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연금으로 목돈 마련했지만 평생소득으로 바꾸긴 어려워
나눠 받더라도 5년, 10년짜리 가교연금 전략하기 십상
100세 인생시대...퇴직연금으로 '오래 버틸 소득' 만들어야

[칼럼니스트=김병철 한국퇴직연금개발원 대표] “최 부장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30년을 다닌 회사에서 마지막 인사를 받은 날, 최 부장의 IRP 계좌에는 퇴직연금 3억 원이 한꺼번에 들어왔습니다. 매달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사라진 뒤 갑자기 목돈을 마주하니 불안감이 밀려옵니다. 주변에서 “이참에 프랜차이즈 하나 해보시라”고 부추깁니다. 평생 회사 일만 했지 장사는 해본 적 없는 최 부장이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3억 원 중 상당액을 창업 자금으로 쏟아붓습니다. 통계는 이 결말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업종과 기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준비 없이 시작한 생계형 창업이 오래 버티기 어렵다는 사실은 여러 통계가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앞선 네 장에서 우리는 어렵게 모은 돈이 낮은 수익률과 잦은 이직 속에서 어떻게 새어 나가는지를 살펴봤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파도를 무사히 넘기고 은퇴하는 날까지 살아남은 돈에게도, 마지막 함정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왜 월급이 아니라 목돈으로 받는가 — 일시금의 늪

퇴직연금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이 이 돈을 ‘연금’이 아니라 ‘목돈’으로 받습니다. 매달 일정액이 나오는 월급 같은 소득이 아니라, 은퇴하는 그날 한꺼번에 통장에 꽂히는 거액인 셈입니다. 평생 다달이 급여를 관리해본 경험은 있어도, 몇 억 원의 목돈을 30년에 걸쳐 계획적으로 나눠 쓰는 경험은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목돈은 자녀 결혼 자금, 빚 상환, 그리고 최 부장처럼 준비 없는 창업으로 순식간에 흩어지곤 합니다.

퇴직금은 왜 아직도 ‘마지막 월급’처럼 보이는가

이 장면을 단순히 개인의 충동이나 무지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한국에서 퇴직금은 오랫동안 ‘연금’이라기보다, 회사를 떠날 때 받는 마지막 보상처럼 여겨졌습니다. 오래 일했으니 한 번에 받는 돈, 인생 2막을 시작할 밑천, 자녀에게 한 번은 보태줘야 할 목돈. 이름은 퇴직연금으로 바뀌었지만, 사람들의 머릿속 이미지는 여전히 퇴직금에 가깝습니다.

제도도 이 인식을 완전히 바꾸지 못했습니다. IRP 계좌로 돈을 옮기게 만들었지만, 그다음 단계에서 “이 돈을 어떻게 평생 소득으로 바꿀 것인가”를 안내하는 길은 충분히 넓지 않습니다. 창구에서는 일시금 수령이 가장 단순하고, 세금도 생각보다 무겁지 않으며, 연금으로 받을 만한 상품은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가장 익숙한 선택을 합니다. 계좌를 깨고, 목돈을 받고, 스스로 알아서 버텨보는 길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핵심은 “왜 사람들은 참지 못하고 돈을 쓰는가”가 아닙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제도는 어렵게 쌓은 자산을 매달 들어오는 소득으로 바꿔주지 못하는가. 연금의 본질은 큰 숫자의 잔고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끊기지 않는 현금흐름입니다. 한국 퇴직연금은 아직 그 전환 장치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사고 싶어도 살 수 없다 — 텅 빈 진열대

그렇다면 왜 매달 나오는 연금으로 받지 않을까요? 여기에는 개인의 선택 이전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한국 시장에는 물가상승률을 따라가면서 평생 지급을 보장하는 종신연금 상품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보험사들은 사람들이 예상보다 오래 살 위험을 떠안아야 하는 이 상품을 만드는 데 소극적입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프랑코 모딜리아니는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누구나 종신연금에 가입해야 하는데, 왜 사람들은 이를 꺼리는가”를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Annuity Puzzle)라 불렀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진짜 문제는 사람들이 종신연금을 꺼리는 게 아니라, 애초에 살 만한 상품 자체가 진열대에 없다는 ‘공급의 실패’에 더 가깝습니다.

가교연금의 함정 — 10년짜리 다리로 30년을 건널 수는 없다

설령 목돈을 한꺼번에 쓰지 않고 나눠 받는다 해도, 또 다른 함정이 기다립니다. 주된 직장에서 물러나는 평균 나이는 49.4세인데, 실제로 노동시장에서 물러나는 시점은 72.3세로 늦춰진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 사이 23년의 간극을 채우기 위해, 많은 사람이 퇴직연금을 5년, 10년짜리 ‘가교 연금’으로 나눠 받는 전략을 씁니다. 국민연금이 시작될 때까지 버티기 위한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이 선택은 어리석은 선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의 법과 세제가 그런 선택을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우리나라 퇴직연금 제도는 일정 요건을 갖춰 10년 안팎으로 나누어 받으면 그것을 ‘연금 수령’으로 인정하고 세제 혜택을 줍니다. 반대로 죽을 때까지 받는 종신소득이나 20년, 30년을 넘는 긴 인출 기간을 특별히 더 강하게 강조하는 구조는 아직 약합니다. 그러니 가입자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한꺼번에 찾는 것보다 10년 동안 나눠 받으면 연금으로 인정된다는데, 그 정도면 된 것 아닌가?”

바로 여기서 가교연금의 함정이 생깁니다. 10년 동안 나눠 받는 것은 일시금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평생 소득은 아닙니다. 국민연금이 시작되는 65세 무렵까지 다리를 건넜다 해도, 그 뒤로 80세, 90세, 어쩌면 100세까지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다리는 건넜지만, 그 뒤로도 남은 수십 년을 버 물이 배낭에 남아 있지 않은 셈입니다.

따라서 진짜 질문은 “연금으로 받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오래 버틸 소득으로 바뀌었는가”입니다. 법이 인정하는 연금 수령과, 노후를 실제로 지탱하는 평생 월급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한국 퇴직연금은 이 둘을 너무 쉽게 같은 것으로 취급해 왔고, 그 틈에서 10년짜리 가교가 마치 충분한 연금처럼 보이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다섯 가지 이야기

이직할 때마다 조각나지 않고, 낮은 수익률의 늪도 피해간 돈이 있다 해도, 결국 은퇴하는 그날 통째로 비워지고 마는 배낭. 이것이 한국 퇴직연금이 안고 있는 다섯 번째 결함입니다. 배낭은 은퇴하는 날 열어 한꺼번에 비우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긴 여정 동안 조금씩 꺼내 쓰며 끝까지 나를 살려야 하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퇴직연금 개혁은 운용 수익률을 높이는 데서 멈출 수 없습니다. 돈을 잘 쌓게 하는 제도, 이직해도 깨지지 않게 하는 제도,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돈을 10년짜리 다리가 아니라 평생 소득으로 바꿔주는 제도가 함께 있어야 합니다. 어느 한 단계라도 빠지면, 연금은 다시 목돈이 되고 목돈은 다시 사라집니다.

그런데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이미 이 제도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애초에 이 게임에 초대조차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떨까요?

마르는 배낭: 어렵게 지킨 돈이 하루 만에 사라지는 이유[김병철의 퇴직연금 개혁 시나리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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