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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만세!", 이름없는 이들이 거리로 [그해 오늘]

장영락 기자I 2025.04.04 12:07:19

1919년 4월 4일, 당진, 익산 강진 등서 독립운동 시위
계층 무관 대중들 광범위하게 참여

[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일제 3.1 운동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해인 1919년 4월 4일 충남 당진, 전남 강진, 익산 등에서 벌어진 4.4 독립만세운동을 알고 있는 이들은 많지 않다. 지역 주민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이 시위들은 전국에서 200만명이 넘게 참여한 3.1운동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기층 대중의 대규모 항거라는 데서 큰 의미가 있었고, 이웃 지역의 연이은 독립운동을 촉진하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서울 종로. 서울시
1919년 4월 4일 충남 당진 대호지면에서 지역 최대의 독립운동 시위가 벌어졌다. 대호지면에서 정미면 천의장터까지 시위가 이어졌고, 여기에는 대호지면장과 지역 독립운동 인사들이 참가했다.

민관이 협력한 평화적인 시위였으나 일본 경관들이 해산을 위해 발포하면서 분노한 군중들이 돌을 던지고 천의 주재소를 파괴했다.

일제는 4일 저녁 군경을 파견해 진압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송봉운 등 3인의 열사가 총격으로 사망했고, 이후 일제 색출작업으로 수백명이 체포됐다. 그 결과 옥중에서 순국한 이만 3명, 징역을 산 이들이 39명이다. 이 만세 운동으로 120명이 후일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같은 날 전남 강진에서도 항일 시위가 벌어졌다. 강진 운동은 청년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됐다는 점이 특징으로, 독립운동에 뜻이 있던 이들이 주축이 되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강진 장터에서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를 준비한 강진읍교회 인사들과 청년들은 독립만세 물품을 장터에 나르고 대형 태극기를 뒷산에서 흔들어 군중들의 호응을 유도했다. 4000여명의 시민들이 호응하여 결국 일제 군경이 발포까지 하면서 해산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주도자들 대부분이 체포됐다.
당진 4.4 기념탑. 현충시설정보서비스.
익산에서도 4월 4일 1000여명의 시민들이 이리(익산 옛 지명) 장날을 맞아 장터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익산에서는 3.1운동이 기독교와 천도교 진영이 협력해 운동을 조직했다는 데 의의가 있는데, 4일 만세 운동에서는 이같은 노력에 부응해 계층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시위 규모에 당황한 일제는 군경을 동원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고 6명의 열사가 순국했다.

혹독한 식민지 지배를 거쳐 분단에 이은 동족상잔, 독재까지 극단의 시대를 거쳐온 이 나라에서 퇴행과 야만을 막기 위해 일어선 곳에는 언제나 이름조차 남아있지 않은 기층 대중들이 있었다. 한국인들에게 각인처럼 남아있는 3월 1일은 물론, 조금은 잊힌 4월 4일 역시 그같은 의분의 역사로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유권자들 선택을 받은 지도자가 또다시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 오늘, 그 의미는 더욱 각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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