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유럽 국가들이 일제히 한 곳을 바라보며 칼을 갈고 있다. 22일(현지시간) 유럽중앙은행(ECB)이 국채 등 대규모 채권 매입에 나설 것이 확실해지자 스위스,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이 바짝 긴장하며 환율 방어에 나서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유럽 전체는 물론, 일본 등 아시아로 번질 조짐이다. 유럽발(發) 환율 전쟁의 서막이 오른 셈이다.
◇ 스위스에 이어 덴마크까지 ‘환율 방어’
지난주 스위스 중앙은행(SNB)은 자국 통화인 프랑에 대한 환율 하한선(유로당 1.20프랑)을 폐지하는 깜짝 결정을 내렸다. 마이너스 예금금리도 확대해 -0.25%에서 -0.75%로 무려 0.5%포인트나 낮췄다.
ECB의 대대적인 돈 풀기로 유로화 가치가 급락할 것으로 예측되자 더 이상 유로화 대비 프랑 가치를 끌어내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한 일종의 백기투항이었다. 그러나 환율 하한제 폐지 이후 프랑이 한꺼번에 유로화 대비 40%가량 급등하는 등 통제권을 벗어나자 스위스는 한 발 후퇴한 모습을 보였다. 스위스 중앙은행의 토마스 요르단 총재는 “필요할 경우 외환시장 개입을 재개하겠다”며 “마이너스 예금금리를 지속적으로 강화하고 있는 만큼 프랑에 대한 매력을 다소 낮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덴마크도 행동에 나섰다. 덴마크 중앙은행은 19일 예금금리를 -0.05%에서 -0.2%로 0.15%포인트 기습 인하했다. 대출금리도 0.2%에서 0.05%로 내렸다. 덴마크 역시 자국 통화인 크로네가 유로대비 상승하지 못하도록 한 조치로 풀이된다. 다만 덴마크는 스위스처럼 환율 하한제를 폐지하는 것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 덴마크는 유로화 대비 크로네 환율 변동폭을 ±2.25%(유로화 대비 7.62824~7.29252크로네)로 제한해놓고 있다.
덴마크 단스케 방크의 스틴 보시안 글로벌 리서치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적어도 한 번 더 금리를 내리거나 적어도 0.1%포인트 가량 추가 인하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스위스와 덴마크는 경상수지 흑자폭이 커 투자자들에겐 안전 피난처(safe haven)로 분류되고 있다. 자본유입이 지속되면서 환율을 방어하기 위한 외환시장 개입이 대폭 증가, 외환보유액 규모도 점점 불어났다. 덴마크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외환보유액이 두 배나 급증했고, 스위스도 환율 하한제를 실시했던 3년여 동안 두 배 가량 급증했다.
◇ 스웨덴 노르웨이 아시아까지 번질 수도
이러한 행보는 스웨덴, 노르웨이 등의 다른 유럽국가에도 번져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자율변동환율제를 채택하고 있는 스웨덴은 지난해 10월 기준금리를 0.0%로 낮춘 후 동결해왔으나 다음 달쯤 마이너스 예금금리를 도입하거나 외환시장 개입을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스테판 잉베스 스웨덴 중앙은행 총재는 의사록을 통해 밝혔다.
노르웨이 역시 지난달 기준금리인 하루짜리 예금금리를 2년 9개월만에 1.25%로 0.25%포인트 낮췄다. 다만 산유국인 노르웨이는 국제유가 급락에 이미 크로네 가치가 하락하고 있어 스위스, 덴마크와는 상황이 다르다.
닐 멜러 BNY멜론 외환 전략가는 “스웨덴의 비전통적인 통화정책 등으로 노르웨이가 금리 인하 등 압박을 받을 수 있지만,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며 “이것이 환율 전쟁”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수순은 유럽 지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아시아 국가들도 경제가 성장 궤도에 올라서지 않은 상황에서 국제 유가 급락이 금리 인하 등 완화적인 통화정책에 대한 공간을 넓혀주고 있다. 인도는 지난 주 기준금리를 1년 8개월만에 8.0%에서 7.75%로 깜짝 인하했다. 중국 인민은행도 예대율을 낮추면서 8080억위안(약 150조원) 규모가 시중에 풀렸다. 일본은행(BOJ)도 최근 특별대출프로그램을 연장한데 이어 상장지수펀드(ETF) 등 위험자산을 추가 매입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고바야시 신이치로 미쓰비시UFJ 리서치 및 컨설팅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21일 통화정책회의에선 정책 변화가 없겠지만 4월쯤 광범위한 양적완화 정책이 실시될 것”이라고 점쳤다.
일부에선 ECB의 대규모 돈 풀기에 앞서 주변국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지만, 상황이 반전될 수 있단 우려도 나온다. 헤지펀드인 SLJ매크로파트너스 스티브 젠 공동설립자는 “유로존 이웃들이 너무 단단한 모자를 쓰고 있다”며 “ECB가 시장을 실망시킬 위험이 크다. 이 경우 금융시장은 상당히 위축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