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페이`·`월급루팡` 낳는 주52시간제…美·獨식 유연화가 답

최정훈 기자I 2022.06.13 16:08:34

[글로벌 스탠더드에서 답을 찾다]주52시간 근로제①
경직된 주 52시간 근로제 자율성도 창의성도 저해
독일, 초과근로시간 저축해서 휴가부터 육아까지 활용
전문성 인정하는 미국, 고액근로자 근로시간 규제 예외
"근로자대표 불분명해 제도 도입시 사용자 쏠림 우려"

[이데일리 최정훈 기자] 서울의 30대 직장인 A씨는 `열정페이`와 `월급루팡(월급만 받고 일 안하는 사람)`의 연속이다. 일이 몰릴 땐 야근에 시달린다. 이미 허용된 연장근로 시간도 훌쩍 넘겨 초과근로수당도 받기 힘들다. 그러다가도 일이 없는 날은 퇴근 시간만 기다리며 사무실에서 시간만 축낸다.

독일의 30대 직장인 B씨는 한 달간 휴가를 내고 여행을 떠났다. 이번 휴가는 프로그래머인 A씨가 프로젝트 업무로 이어진 초과근로시간을 따로 저축해뒀다가 사용하는 것이다. 자신의 동료도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초과근로시간을 활용해 2주간 휴가를 떠났다.

실외 마스크 착용 의무 해제 첫 날인 지난달 2일 오전 서울 여의도역 인근에서 직장인들이 마스크를 쓰고 출근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2018년 도입된 주 52시간 근로제로 인해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장시간 근로는 일정 부분 개선됐지만, 경직적 제도 운용으로 기업과 근로자 모두 불만이 쌓이고 있다. IT 스타트업부터 예술·전문직까지 적용되는 일률적인 제도 운용 방식이 오히려 경제 활력을 저해시킨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은 근로자의 건강권 등을 담보하는 하에서 비효율적인 근로시간 제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일본부터 독일, 미국, 프랑스 등 우리나라보다 근로시간이 짧으면서도 선택권 확대로 효율성을 끌어 올린 선진국의 근로시간제도가 주목받는 이유다.

◇근로시간 짧아도 효율은 더 좋은 선진국 근로시간 제도

13일 관가에 따르면 고용노동부는 주 52시간 근로제의 개선을 위한 전문가 의견을 수렴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국정과제인 이번 개선은 정부가 근로시간을 일률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사가 합의를 통해 근로시간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확대하기 위해 마련됐다.

근로시간 유연화는 2018년 도입된 주 52시간 근로제가 일률적이고 경직적이라 자율성·창의성 기반의 4차 산업혁명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이어지면서 화두가 됐다. 고용부는 근로시간의 선택권을 근로자에게 돌려주는 것이 제도 개선의 본질이라며 건강권 담보된 개편에 나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용부 관계자는 “근로시간 선택권 확대 방안은 전문가가 합리적이라고 공감해줄 수 있어야 하면서, 노사 모두가 완전히 만족하지는 못하더라도 극렬하게 반대하지 않는 범위는 되어야 한다”며 “기업과 노조의 입장뿐 아니라 해외사례와 젊은 근로자들의 생각까지 두루두루 살펴보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고용부가 제도 개편 과정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해외 주요 선진국 사례다. 이미 주 40시간 근로제가 정착된 해외 선진국의 주요 근로시간 제도는 새 정부의 근로시간 유연화 국정과제 방안의 기반이다. 특히 독일이나 일본, 미국 등에서 활용되는 근로시간 제도가 논의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독일의 근로시간저축계좌제(자료=고용노동부 제공)


먼저 유럽의 경제 대국 독일의 대표적인 근로시간 제도는 근로시간저축계좌제로, 초과근로시간을 저축해서 유급휴가로 활용할 수 있는 제도다. 노사는 협약을 통해 적립 한도와 정산기간을 설정한 뒤 제도를 활용한다. 통상 초과근로를 통해 250시간 가량까지 적립한 뒤 1년 후 활용하는 식이다.

독일 근로자의 24.1%가 이 제도를 활용해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배정한다. 특히 저축계좌는 유급휴가로 활용하는 단기계좌와 함께 장기계좌로도 쓸 수 있다. 장기계좌는 안식년과 육아, 직업훈련, 조기 퇴직 등에 활용된다. 또 저축해 놓은 시간을 쓰지 못하고 회사가 도산해버리는 경우에 대한 대비책도 있어야 한다.

미국은 근로시간 유연화의 일환으로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collar Exemption) 제도로 유명하다. 쉽게 말해 전문성을 가진 고액연봉 근로자는 근로시간 규제 없이 자유롭게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임금 수준은 숙식 등을 제외하고 주급 913달러, 연봉 13만4004달러(한화 1억7000만원) 이상일 경우 해당한다.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자료=고용노동부 제공)


이웃나라 일본도 우리나라보다 상대적으로 근로시간이 유연한 편이다. 일본은 주 40시간 제도가 정착해있지만, 사용자가 근로자대표와 서면합의를 하면 1년간 최대 360시간의 연장근로를 할 수 있다. 예견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해 업무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 720시간까지도 연장근로가 가능하다.

특히 일본은 노사 합의를 기반으로 근로시간을 선택권을 보장하고 있다. 평균 근로시간을 지키면서 일이 많은 기간과 적은 기간의 근로시간을 유연하게 운영하는 탄력 근로제의 종류도 다양하다. 1개월 단위로만 운영할 수 있는 우리나라와 달리 1주일 단위와 1년 단위의 방법도 활용할 수 있다. 계절성으로 바쁜 기간이 다를 수 있는 업종과 하루 단위로 성수기와 비수기 차이가 큰 업종 등 업종의 다양성을 고려한 것이다.

이외에 근로시간 규정이 엄격하다고 평가를 받는 프랑스의 경우, 1년 단위로 탄력근로제를 운영할 수 있는데다, 산별협약을 통해 3년까지 단위 기간을 늘릴 수 있다. 영국도 주 48시간 근로시간제를 운영하고 있지만,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많은 예외 규정을 두고 있어 유연하게 근로시간을 규제하는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

◇“불분명한 근로자대표로 인한 사용자 쏠림 우려”

다만 근로시간 선택권을 확대하는 과정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다. 선진국의 근로시간제도는 노사 합의를 기반으로 두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낮은 노조 조직률 등으로 인해 근로자대표가 불분명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흥준 서울과학기술대 경영학과 교수는 “근로시간 조정을 노사가 협의해서 할 수 있게 하려면 근로자대표가 명확해야 하지만, 우리나라 법에는 근로자대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다”며 “과반수 노조가 없거나 아예 노조가 없는 경우 근로자대표가 모호해져 사용자가 마음대로 시간을 조정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이어 “독일의 경우 근로자대표제도가 매우 잘 정비되어 있어 노사 합의를 기반으로 근로시간저축계좌제 운영이 가능한 것”이라며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도 우리나라에 적용하려고 하면 고액 연봉자의 기준을 세우는 것부터 큰 논란이 일 수 있어 단기간 내 추진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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