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의 송별회 자리에서 오가는 대화입니다. 30대, 40대 직장인에게 이직은 몸값을 올리는 기회이자, 목돈을 만질 수 있는 ‘보너스 타임’으로 여겨집니다. 평생직장의 신화는 진작에 무너졌고, 우리는 정년까지 여러 번 회사를 옮겨 다니는 ‘잡 노마드(Job Nomad)’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회사를 옮길 때마다, 어렵게 쌓아 올린 퇴직연금 탑을 스스로 무너뜨린다는 점입니다. 마치 유리처럼 쉽게 깨진다고 해서, 저는 이것을 ‘유리 연금’이라 부릅니다.
환승역에서 길을 잃다 — IRP의 탈선
정부는 이직할 때 퇴직금이 생활비로 증발하는 것을 막기 위해 2012년 IRP(개인형 퇴직연금, 이직하거나 퇴직할 때 받는 퇴직금을 모아두었다가 만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탈 수 있도록 하는 개인 전용 계좌)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퇴사자가 퇴직금을 현금으로 바로 받지 못하게 하고, 일단 IRP 계좌로 강제 이체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일종의 ‘강제 저축 정거장’을 만든 셈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떨까요? 근로자들은 정거장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환불’ 창구로 달려갑니다. 정확한 시점별 통계는 조사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IRP로 이전된 퇴직금의 상당수가 연금 개시 연령인 55세가 되기 전에 중도 해지되어 일시금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확인됩니다. 퇴직연금 제도는 “이 돈을 55세까지 가져가라”고 말하지만, 현실의 근로자는 “당장 급한 대출 끄고, 아이 학원비 내고, 차 바꾸는 게 낫다”고 판단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성향이 유독 급해서가 아닙니다. 제도가 계좌 해지의 문을 너무 활짝 열어두었기 때문입니다.
‘출금’ 버튼을 누르는 순간, 복리 효과가 멈춘다
퇴직연금이 진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복리 효과(원금에 붙은 이자가 다시 새로운 이자가 낳으며 눈덩이처럼 자라나는 효과) 덕분입니다. 오래 묵혀둘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이 연금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이직할 때마다 이 눈덩이를 부숴 ‘출금 버튼’을 누릅니다. A사를 그만두며 받은 3천만 원을 써버리고 B사에서 다시 0원부터 시작합니다. 5년 뒤 B사를 그만두며 받은 4천만 원을 또 써버리고 C사에서 다시 0원부터 시작합니다. 이런 출금을 네댓 번 반복하고 나면, 은퇴 시점에 남는 것은 마지막 직장에서 받은 퇴직금 푼돈뿐입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 되어야 할 연금이 “티끌 모아 티끌”로 끝나는 구조입니다.
계좌가 나를 따라오지 못하는 이유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요? 한국의 퇴직연금은 애초에 ‘기업연금’을 뿌리로 설계됐습니다. 확정기여형(DC)조차, 회사의 계좌 안에 근로자 개개인의 ‘가상 계좌’를 만들어 각자 운용하게 하는 구조입니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바뀌지 않는 한, 내 퇴직연금은 여전히 ‘회사의 계좌’ 안에 머물러 있는 셈입니다.
이직을 하면 그제야 적립금이 회사의 계좌에서 나와 온전히 ‘내 것’인 개인 계좌, 즉 IRP로 옮겨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복잡한 문제가 생깁니다. 나중에 근로자가 퇴직할 때 낼 세금(퇴직소득세)을 정확히 계산하려면, 이 돈이 ‘어느 회사에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하며 쌓인 돈인지에 대한 정보를 꼬리표처럼 계속 붙이고 다녀야 합니다. 이 정보를 추적하고 관리하는 세무 행정이 너무 복잡하다 보니, 은행이나 증권사에서는 기존에 사용하던 IRP 계좌에 새 퇴직금을 합쳐주기보다 “그냥 새로운 IRP 계좌를 하나 더 만드세요”라고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좌를 합치다가 자칫 세무 계산이 꼬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나중에 이렇게 흩어진 계좌를 다시 하나로 합치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잡한 증빙 서류를 떼서 금융기관을 직접 방문해야 하니, 번거로움(Friction)이 계좌가 생길 때와 합칠 때 두 번에 걸쳐 발목을 잡는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나는 것이 바로 조각난 IRP 계좌들입니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문제를 겪은 나라가 있습니다. 연금 선진국으로 꼽히는 호주도 제도 초기에는 계좌가 사람을 온전히 따라오지 못하고 이직할 때마다 새로 생기는 문제를 겪었습니다. 다만 그다음 갈림길이 달랐습니다. 한국의 근로자들은 이렇게 쪼개진 계좌를 보면 그냥 통째로 출금해 버립니다. 반면 호주의 근로자들은 여러 개의 계좌를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조각나서 깨지고, 호주는 흩어져서 방치된 채 수수료만 빠져나갔습니다 — 증상은 달랐지만, 계좌가 나를 온전히 따라오지 못한다는 뿌리는 같았습니다. 내 계좌가 나를 따라오지 않고 내가 계좌를 찾아다녀야 하는 전근대적인 행정 시스템이, 근로자들을 해지의 유혹으로 떠밀고 있습니다. 호주가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는지는 Part 2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연금은 ‘보너스’가 아니라 ‘생존 배낭’이다
평생 한 직장만 다니는 시대가 끝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직할 때마다 받는 ‘퇴직 보너스 목돈’이 아닙니다. 노후라는 척박한 광야를 건널 때 등에 메고 가는 ‘휴대용 연금 배낭(Portable Pension, 회사를 옮겨도 내 신분증처럼 내 뒤를 항상 따라오며 합쳐지는 연금제도)’입니다. 이 배낭은 회사를 옮길 때마다 비워져서는 안 됩니다. 전 직장에서 받은 식량과 새 직장에서 받을 식량이 차곡차곡 하나의 배낭에 합쳐져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직이라는 이벤트가 발생할 때마다 연금 배낭에 구멍이 뚫려 내용물이 와르르 쏟아집니다.
이 구멍을 메우려면 계좌의 연속성을 강제하고, 중도 해지를 어렵게 만드는 장치가 필요합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퇴직연금의 세제 기록도 회사를 따라 끊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이 연금 계좌 안에 머문 시간과 끝내 연금으로 인출되는지를 중심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계좌만 이어지고 세금의 꼬리표가 끊어지면, 근로자는 여전히 은행 창구와 서류 사이에서 길을 잃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령 이 배낭이 이직의 파도를 무사히 넘기고 은퇴하는 날까지 깨지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해도,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다음 장에서는 그렇게 지켜낸 배낭이 은퇴하는 바로 그날, 통째로 뒤집혀 순식간에 텅 비어버리는 또 다른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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