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에너지 위기 속 역대 최악의 재무위기 상황에 빠진 한국전력공사(015760)와 한국가스공사(036460)의 재무 불확실성은 당분간 이어지게 됐다. 당·정 모두 요금 인상의 필요성에는 공감했으나 국민부담 우려를 고려해 좀 더 검토 시간을 갖기로 했다. 최종 결정까지는 3~4주 가량이 걸릴 전망이다.
31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이창양 산업부 장관을 비롯한 주요 관계자는 이날 오전 10시에 국회에서 이와 관련한 당정 협의를 진행한 결과 전기·가스요금 조정을 잠정 연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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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겨울 ‘난방비 폭탄’ 이슈로 제때 요금 조정을 결정하는 데 부담을 느낀 모양새다. 지난 겨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1년 새 천연가스·지역난방 요금이 약 40% 오른데다 추위가 예년보다 더 빨리 찾아오면서 체감 난방비가 1.5배 이상 오르며 ‘난방비 폭탄’이 전 사회적 이슈가 됐었다. 정부는 부랴부랴 취약계층에 대한 지원을 예년의 4배 가량 늘리고 지원 대상도 확대하며 대책 마련에 나섰으나 ‘뒷북 대책’이라는 비판도 받았었다.
당정은 이날 협의회에서 원가 이하의 에너지요금이 이어지면 공기업 재무상황 악화와 그에 따른 안정적 공급기반이 위협받을 수 있고, 에너지 절약 및 소비효율 개선 유인이 약화한다는 점 등을 들어 전기·가스요금 인상의 불가피성에 대한 인식과, 국민부담 최소화를 최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고 산업부는 전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당장은 서민생활 안정과 국제 에너지가격 추이, 물가 등 경제 영향, (공기업 적자에 따른) 채권시장 영향과 공기업 재무상황을 더 면밀히 검토 후 조속한 시일 내 전기·가스요금 조정방안을 발표하기로 했다”고 전했다.
산업부는 앞으로 관계부처와 관련 공기업, 에너지 전문가, 소비자단체 등 이해관계자와 간담회를 열고 추가적인 의견수렴에 나설 계획이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요금 조정의 필요성과 파급 효과, 제도 개선 방안 등도 논의한다.
당정이 앞선 ‘난방비 폭탄’을 고려해 전기·가스요금 인상 결정과 함께 여름철 ‘냉방비 폭탄’에 대비한 취약계층 지원책을 함께 발표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를 고려하면 2분기 요금조정까지는 최소 3~4주가 더 걸릴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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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정의 이번 결정으로 역대 최악의 재무 위기 상황에 놓인 한전과 가스공사의 불확실성은 당분간 이어지게 됐다.
업계는 이번에 전기요금이 1킬로와트시(㎾h) 최대 13.1원 가량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산업부가 작년 말 올해 발전원가가 차츰 안정된다는 전제로도 연 51.6원/㎾h은 더 올려야 한전의 적자 확대를 막을 수 있다고 전망한 만큼 매분기 약 13원씩은 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산업부는 당정에서도 이를 포함한 2개안을 제시했고, 당 지도부도 인상 필요성에 공감하며 상당 부분 의견 접근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정이 결정 자체를 미루며 한전의 적자와 가스공사의 미수금은 계속 불어나는 게 불가피하게 됐다. 한전은 재작년 말 시작된 국제 에너지 위기와 그에 따른 석탄·가스 등 발전 연료 급등으로 역대급 적자를 기록 중이다. 2021년 역대 최대 규모인 5조80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데 이어 지난해는 적자 폭이 무려 32조6000억원까지 늘었다. 업계는 한전이 올 1분기에도 약 5조3000억원의 적자를 냈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한전은 올 1월 기준으로도 전기를 164.2원/㎾h에 사서 147.0/㎾h에 판매했다. 1㎾h당 17.2원, 운영비를 뺀 원가만으로도 약 12% 밑지고 판매한 셈이다. 이것도 그나마 정부가 전력도매 기준가격(SMP) 상한제를 도입해 민간 발전사들의 이익을 억제한 데 따른 것이고, SMP 상한제를 적용하지 않은 3월부턴 손실 폭이 더 커진 상황이다. 이대로면 한전이 재작년부터 쌓아 온 적자 규모는 43조8000억원까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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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곧 한전이 빚을 내서도 전력을 사거나 운영자금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전의 자본·적립금은 재작년 말 46조원이었으나 지난해 대규모 적자로 21조원까지 줄었다. 올 1분기 말에는 10조원대로 더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전은 법적으로 자본·적립금의 5배 이상(산업장관 승인시 6배)의 채권을 발행할 수 없는 만큼 채권 발향 자체가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다. 한전은 작년 말 기준 이미 약 72조원의 채권이 쌓여 있다.
국회가 작년 말처럼 한전의 법적 채권발행 한도를 추가로 늘려주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국내 채권시장에 끼칠 영향 때문에 무한정 늘릴 수도 없다. 작년 국내 채권시장은 초우량 채권인 한전채가 자금을 싹쓸이해가는 통에 다른 기업이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가스공사의 상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스공사는 법적으로 국내 공급단가에 원가를 보장하게 돼 있어 수치상으론 한전처럼 영업적자를 기록하진 않지만, 실제론 정부의 가격 통제 아래 국내 도시가스 공급사로부터 받지 못한 미수금 형태로 남게 된다. 이 미수금은 재작년 말 1조8000억원 수준이었으나 지난해 말 9조원까지 치솟았고 올 1분기 말엔 12조원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가스공사 역시 이를 고스란히 채권 발행, 즉 부채를 늘려 메워야 하는 상황이다.
이 같은 상황을 고려하면 당정도 결국은 전기·가스요금을 일정 수준 이상 올릴 수밖에 없으리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번에 동결을 결정하는 대신, 결정을 연기한 것도 결국은 충분한 보완대책을 세운 후 요금 인상을 하겠다는 의지로 풀이할 수 있다.
2분기(4~6월)는 냉·난방 수요가 크지 않아 에너지 요금 인상 체감이 낮아 냉방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는 여름철을 앞둔 사실상 마지막 요금 인상 기회다. 6월 말 진행하는 3분기(7~9월) 요금조정 땐 ‘냉방비 폭탄’ 부담이 더 커진다.
에너지업계 한 관계자는 “지난 겨울 난방비 폭탄도 결국 정부가 충분한 가격 신호 없이 요금을 갑작스럽게 올리다보니 소비자들이 이에 대비하지 못해 더 커진 측면이 있다”며 “여름을 앞두고는 미리 가격 신호를 충분히 줘서 에너지 절감을 유도해야 ‘냉방비 폭탄’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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