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017년 3월 미술계를 속 쓰리게 했던 ‘사건’이 있다. 리움미술관에서 불어온 찬바람이다. 홍라희 관장과 홍라영 부관장이 연달아 사퇴하며 4년여간 긴 침묵에 빠졌던 서막을 연 셈인데. 꽃 피는 춘삼월에 드리운 냉기가 만만치 않았다. 물론 다 지난 ‘옛일’이다. 2021년 10월 재개관으로, 문턱 낮추고 이미지 바꾸고 내부 리노베이션까지 해치운 리움미술관의 ‘부활’을 이미 봤으니.
굳이 이런 히스토리가 필요한 건 ‘김환기 회고전’ 때문이다. 리움미술관이 공식행보를 중단함에 따라 예정했던 전시일정에도 차질이 불가피했는데. 그중 그해 4월 개막을 앞둔 ‘김환기 회고전’이 있었다. 진한 예고편만 날리고 바로 직전, 코앞에서 멈춰섰던 거다. 미술시장이 바닥을 찍기 전이라 그때 한국서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1913~1974)는 말 그대로 ‘넘사벽’. 그러니 ‘리움과 김환기’, 그 거대한 두 산맥이 과연 어떤 시너지를 연출할지 안팎으로 한껏 관심이 달아올랐던 터다. 하지만 지상 최대의 이벤트가 될 뻔했던 드라마는 결국 불방했고, 두고두고 아쉬움만 번져냈더랬다.
그 ‘김환기 회고전’이 2023년 새해 찾아온다. 4월 개막을 다시 예고했으니 정확히 6년 만이다. 이 굵직한 기획전이 신호탄이 됐을까. 2023년 예정한 국내 미술전시는 블록버스터급이 줄줄이다. 에드워드 호퍼(1882∼1967), 마우리치오 카텔란(63), 장욱진(1917∼1990), 김구림(87) 등, 국내외 대가들의 개인전에 더해 알렉산더 칼더(1898∼1976)와 이우환(87)의 2인전까지. 아무 해나 찾아올 수 없을 규모와 라인업이 대기 중이다.
◇해외 대가의 개인전 혹은 개인기…블록버스터급 줄줄이
고즈넉한 밤시간에 홀로 앉은 누군가를 훔쳐보는 듯한 화면. 덕분에 도시에 사는 현대인의 고독을 가장 잘 끌어냈다고 평가받는 미국작가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이 상반기 대거 한국으로 날아온다. 서울시립미술관이 뉴욕 휘트니미술관과 공동기획한 ‘에드워드 호퍼: 길 위에서’ 전(가제)이다(4월 20일∼8월 20일 서소문본관).
미국 대표 사실주의적 화가로 꼽히는 호퍼는 20세기 미국인의 삶의 단면을 무심하고 무표정하게 포착했다. 키워드는 빛과 그림자. 희미한 음영에 올린 평면적인 묘사, 인간 내면뿐만 아니라 건물 분위기에서도 고독·상실이 뚝뚝 떨어지는 표현이 특징이다. 한국은 물론 아시아에서 여는 호퍼의 첫 개인전이 될 이번 전시에는 대표작 ‘자화상’(1925∼1930)을 앞세워 150여점의 회화·드로잉·아카이브가 걸리고 놓인다.
|
호퍼 못지않게 시선을 훔칠 이탈리아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리움미술관이 준비한 첫 전시작가다(1월 31일∼7월 16일 M2 전층과 로비). “1990년대부터 최근작까지 조각·설치·벽화 등 주요 작품을 총망라”할 전시 역시 카텔란의 한국 첫 개인전이다.
카텔란은 역설적인 위트와 유머로 종교·정치·사회·예술을 넘나들며 기성체제를 풍자하는 작품으로 주목받고 있다. 익숙한 인물·대중문화 등을 가져다가 부조리 희극에 가까운 미술작품을 꺼내놓는데. 기존 권위에 대한 풍자적인 조롱은 물론 삶·죽음·소외·불안에 대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놓는 통에 ‘뒤샹의 적자’란 별칭이 생길 정도. 비틀어댄 가벼움, 단순화한 급진성이 특징이다.
‘모빌’의 창시자로 유명한 알렉산더 칼더도 새해 주요 전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개인전은 아니다. 2인전이다. 함께 나설 또 다른 작가도 만만치 않다. 한국의 이우환이니까. 국제갤러리가 펼칠 이 특별전(4월 4일∼5월 28일 서울점)은 두 대가의 조화를 어떻게 구성할지에 벌써부터 관심이 쏠린다. 갤러리는 “장르를 불문하고 공간을 활성화한 두 작가의 재료에 대한 탐구와 추상에 접근한다”는 기획의도를 꺼내놨다.
|
◇6년 만에 보게 되는 ‘김환기 회고전’
드디어 보게 될 ‘김환기 회고전’은 6년 전에 비해 변화가 생겼다. 장소를 리움미술관이 아닌 호암미술관으로 옮겨갔다는 거다. 지난해 리노베이션을 진행한 호암미술관이 공사를 마치고 재개관하면서 올리는 첫 전시로 꾸린다(4∼7월).
김환기의 40여년 예술여정을 짚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90여점의 작품과 미공개 습작·자료 등을 꺼내놓는다. 다만 후기 전면점화에 비해 “대중의 관심을 덜 받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 초반 반추상 시기의 작업에 무게를 뒀다”는 게 미술관의 설명이다. 이 시기에서 출발한 집요한 탐구가 말년에 점화로 피어나는 지난한 화업을 더듬어보겠다는 의도다. 리움미술관이 소장한 ‘영원의 노래’(1957), 132억원 낙찰가를 기록하고 한국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된 ‘우주’(1971),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이건희컬렉션의 대표작 ‘여인들과 항아리’(1950s) 등이 한자리에 모일 예정이다.
가히 리움미술관의 전공분야라 할 ‘조선백자전’도 상반기 기대전으로 꼽힌다(2월 28일∼5월 28일 기획전시실). 500여년 조선백자 역사를 아우르게 될 전시는 리움미술관의 개관 이래 첫 도자기전으로도 기대를 높인다. 콘셉트는 ‘형식은 심플하게 내용은 심오하게’. “수많은 종류의 백자를 ‘청화백자’ ‘철화·동화백자’ ‘순백자’로 명쾌하게 나눠보겠다”지만, 그 속에는 국보 10점 보물 21점 등 국가지정문화재 조선백자 절반 이상이 들어 있다.
|
◇장욱진·김구림·동산 박주환…이름만으로 기대 높여
국립현대미술관이라면 단연 대규모 기획전이 먼저다. 하지만 빼고 가면 섭섭한 개인전이 눈에 띈다. ‘장욱진’ 전과 ‘김구림’ 전이다. 장욱진은 가족·까치·집·마을 등 목가적인 소재로 향토색 물씬 풍기는 소박한 조형미, 단순한 절제미 등을 구현한 한국 근대 대표작가. 여기에 김구림은 단연 한국 실험미술의 대표주자다. 1세대 전위예술가로 영화·비디오아트·무용까지 섭렵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했던 터. ‘장욱진’ 전은 덕수궁관(7∼10월)에서, ‘김구림’ 전은 서울관(8∼1월)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동산 박주환컬렉션 특별전’(5∼10월 과천관)도 의미 있는 시공간을 만들 예정이다. 동산 박주환(1929∼2020)이 타계한 뒤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200여점 중 주요작을 뽑아 꾸리는 전시는 ‘이건희컬렉션’을 잇는 기증문화 소개전으로서의 의의가 적잖다. 청년시절 액자·족자·병풍 만드는 표구기술로 출발한 박주환은 1961년 동산방을 설립해 정선·심사정·김홍도·신윤복 등 조선시대 거장은 물론, 이상범·천경자·박노수 등 근대대가의 작품을 도맡아 표구했더랬다. 1975년 업종을 전환해 문을 연 동산방화랑에서 펼친 ‘동양화 중견작가 21인전’(1976), ‘한국 동양화가 30인 초대전’(1977) 등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