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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발명한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이 좋은 사례다. 단천연은법은 끓는점 차이를 이용해 납과 은을 포함한 은광석에서 은만을 뽑아내는 기술이다. 조선시대 연산군 시절 우리나라에서 발명한 은 제련 선진 기술이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함경도 단천에 사는 김감불과 장례원 소속 관노 김검동은 조정에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시연해 보였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는 등 정국이 불안전한데다 조선에 은 화폐 수요가 적었기 때문에 이 선진 기술은 빛을 발하지 못한다.
본국에서 잊힌 기술은 이웃나라 일본으로 전파됐다. ‘패관잡기’에는 중종 말년 왜인들이 납에서 은을 만드는 법을 알아내 일본으로부터 은을 대량으로 들여와 조선의 은값이 폭락했다는 글귀가 있다. ‘중종실록’에는 왕이 연철로 은을 만드는 기술을 전파한 유서종 일가의 일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명령했다고 적혀 있다. 일본 이와미 은광에도 조선의 경수와 종단이란 기술자가 연은분리법(단천연은법)을 전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일본은 조선에서 유래한 단천연은법을 바탕으로 이와미 은광을 포함해 16~18세기 세계 은 생산량의 3분의 1을 책임졌다. 이 은은 일본과 독점 무역을 하던 네덜란드로 흘러 들어갔다. 조선의 단천연은법이 네덜란드가 대항해시대 패권국가로 성장하는 바탕이 된 것이다. 일본은 이와미 은광을 매개로 중세부터 근세까지 이어지는 세계 무역사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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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기술이던 단천연은법을 발명하고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이 세계사의 흐름에 뒤처진 원인으로 ‘쇄국정책’을 꼽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에도 시대 일본 역시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임 박사는 기술자와 기술을 대하는 태도가 조선과 일본의 차이를 갈랐다고 봤다. 그는 “조선은 기술을 천대하고 기술자들을 정치와 관료의 아래에 두고 관리하는데 급급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반면 일본은 조선의 기술자들을 우대했고, 전수받은 기술을 발전시켰다”고 했다.
기술이 한 나라의 가치와 경쟁력을 높이는 원동력이란 점을 감안하면 조선의 역사가 아름답지 않게 끝난 이유를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임 박사는 단천연은법에 얽힌 사연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우리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학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며 “과연 조선시대와 무엇이 달라졌는지 고민해 봐야 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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