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정치 사이에 갇힌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 주제 아래 제주 화산암 포함 국내외 43팀 참여 분자·신체·풍경·우주로 이어진 흐름 변화·실천 메시지 강조하는 테마에도 가늠 못한 중국관-대만관 갈등 논란 매뉴얼·철학 없는 안이함 도마 위에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전경. 전남광주 북구 용봉동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 펼친 본전시 중 한 장면이다.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옮겨온 ‘가장 오래된 참여작’인 ‘제주 화산암-풍화열’(28×68×38㎝) 아래로 스웨덴 2인조 그룹 골딘+세네비가 소나무 송진 2t을 바닥에 부어 만든 호박색 설치작품 ‘송진연못’(2026, 가변크기)이 펼쳐져 있다. 크고 작은 화산암은 전시장 곳곳에 자리를 잡고 ‘변화’의 의미에 무게감을 싣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남광주=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필이면 말이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가 쓴 시(‘아폴론적 토르소’ 1908)의 마지막 구절에 따왔다는 이 테마가 이렇게 엮일 줄은 몰랐을 거다. 비딱하게 보자면 ‘한 치 앞도 못 내다본’, 긍정적으로 보자면 ‘앞으로 풀어내야 할 과제’를 암시한 것처럼 읽힌다는 얘기다.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는 ‘제16회 광주비엔날레’가 내건 주제이자 전시명이다.
전남광주 북구 용봉동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 펼친 본전시를 중심으로 광주비엔날레가 개막한 지 열흘 남짓이다. 광주 일대는 2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아트판으로 물드는 중이다. 하지만 ‘순항’이란 말은 선뜻 나오질 않는다. 북적북적 한창 분위기를 끌어올려야 하는 초반인데 오히려 숨을 죽인 듯한 형국이라고 할까. 여느 회차라면 정관계 고위급 인사를 앞세워 ‘아트 좀 안다’는 발 빠른 관람객을 대거 불러 모을 시점이지만 눈에 띄는 움직임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전경.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초입에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가 쓴 시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1908) 전문이 유리문에 박혀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애매한 이 상황을 만든 결정적인 이유라면 문도 채 열기 전 터진 ‘정치 논란’이 꼽힌다. 본전시 밖에서 펼쳐지는 ‘파빌리온’에 참여하기로 한 중국관과 대만관이 빚은 갈등 때문인데. 발단은 광주비엔날레재단이 국립대만미술관(NTMoFA)의 참여 명칭을 ‘대만관’으로 급하게 승인한 데서 불거졌다. 애초에 기관관인 NTMoFA로 정했던 것을, 대만의 항의를 받고 또 국내외에서 ‘정치검열’이란 비판이 나오자 뒤집은 거다. 재단은 “국가관이 아닌 기관관으로 계약했다”고 맞서다가 결국 대만의 국가관 변경 신청을 받아들였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전경. 중국작가 왕지아하오의 회화작품이 차례로 걸렸다. 왼쪽부터 ‘선탠 후의 휴일’(2024, 180×165㎝), ‘베품’(2024∼2025, 163×197㎝), ‘따뜻한 바람’(2025∼2026, 160×210㎝)(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러자 이번엔 중국관이 들고 일어났다. “하나의 중국을 존중하지 않은 조치”라며 반발하는 것도 모자라 개막을 이틀을 남기고 돌연 철수해버린 거다. 결국 중국관은 설치하던 작품도 버려둔 채 문 한번 열지 않은 상태로 ‘방치’돼 있고 대만관은 예정대로 전시를 진행한 것은 물론 되레 뜨거운 관심을 받는 중이다.
파빌리온은 국제비엔날레 동안 본전시와 나란히 여는 ‘특별전’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국내와 해외의 미술·문화기관이 하나 이상씩 공간을 꾸리고 역량도 내보이고 교류에도 나선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에선 16개 국가관, 11개 기관이 광주 전역 28곳에서 파빌리온을 꾸려낼 참이었다. 하지만 개시도 전에 광주비엔날레가 내세운 ‘예술의 힘’은 사라지고 ‘정치의 힘’으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 버린 거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전경. 이탈리아 작가 로셀라 비스코티가 천연고무로 만든 연작 중 한 점인 ‘무제(고무밧줄)’(2022, 가변크기)를 한 관람객이 허리를 숙인 채 들여다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43명 작가(팀)이 꺼낸 ‘변화’를 봐달라
1995년 첫발을 뗀 광주비엔날레는 이제 32주년을 맞으며 청년기를 거쳐 본격적인 장년기로 들어섰다. 그 묵직함을 이번 회에선 의도하지 않은 ‘조각품’이라 할 제주 화산암으로 실어냈다.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옮겨온 이 돌들을 ‘가장 오래된 출품작’으로 전시장 전체에 걸쳐 꺼내둔 건데. 세상의 변화라는 게 단절과 폭발의 순간에만 일어나는 게 아니란 메시지를 상징했다. 감지하기도 어려울 만큼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도 변화는 쌓인다는 뜻으로 말이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전경.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옮겨온 ‘가장 오래된 참여작’인 제주 화산암 너머로 우즈베키스탄 작가 사오다트 이스마일로바의 단채널 비디오 ‘태양에 녹아든’(2024, 40분)이 흐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예술감독을 맡은 싱가포르 출신 호추니엔(50)은 이 돌들의 참여에 “화산이 터질 때 분출하는 용암은 수만 년간 쌓인 땅속의 압력에다가 냉각·풍화 등 상상하기 어려운 긴 시간이 축적된 것”이라며 “다양한 존재가 서로 다른 속도·규모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지난 4일 전남광주 북구 용봉동 광주비엔날레 전시관에서 ‘제16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에 앞서 싱가포르 출신 예술감동 호추니엔(오른쪽)이 전시작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왼쪽은 공동기획자 중 한 사람인 최경화 큐레이터(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 진중한 무게감은 스웨덴 2인조 예술가 골딘+세네비가 소나무 송진 2t을 바닥에 부어 만든 설치작품(‘송진연못’ 2026)으로 고스란히 이어냈다. 유리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져 볼거리를 만들지만 ‘이동을 차단’한 이 호박색 웅덩이는 “의미와 목적을 잃은 채 과급된 치유의 범람”을 역설한다.
이탈리아 작가 로셀라 비스코티는 몰드 조각으로 제작한 초상 연작(‘문제의 두상들’ 2009∼2015)으로 관람객의 발길을 붙든다. 1942년 로마만국박람회를 위해 빚어졌으나 끝내 빛을 보지 못했다는 거대한 두상(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 베니토 무솔리니)의 본을 떠 원작을 뒤바꿨다. “권위주의적 경직성을 불안정하게 노출된 형태”로.
‘제16회 광주비엔날레’ 본전시 전경. 이탈리아 작가 로셀라 비스코티의 ‘문제의 두상들’ 연작(2009∼2015, 가변크기) 사이를 관람객들이 천천히 이동하고 있다. 작품은 1942년 제작된 거대한 두상(비토리오 에마뉴엘레 3세, 베니토 무솔리니)의 본을 뜬 몰드 조각으로 원작을 뒤바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광주가 품은 아픔·일상을 예술작품으로 끌어올린 시도도 시선을 끈다. ‘오월어머니집’ 어머니들(2006년부터 활동)이 작가 주홍과 함께 그린 그림 322점을 방대한 기억으로 모았다. 아울러 행사기간과 동일하게 496시간 동안 울려 퍼지는 소리작품 ‘공장의 불빛’(김선익, 2026), 전시관 바깥벽에 매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세계 지도자들이 사과하는 모습을 비추는 제임스 T. 홍의 영상(‘사과’ 2012~), 입장티켓 없이도 들어가 볼 수 있는 한 개의 전시실에 다채널 테크노 사운드, 미로형 비닐풍선을 채운 재클린 키요미 고크의 설치작품(‘어긋난 BPM: R로즈 변주곡’ 2026) 등은 전시 그 이상의 의미를 키운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전경. ‘오월어머니집’ 어머니들(2006년부터 활동)이 작가 주홍과 함께 광주가 품은 아픔·일상 등을 그린 그림 322점(2022∼2025, 각 30×30㎝)을 방대한 기억으로 모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전경. 재클린 키요미 고크의 설치작품 ‘어긋난 BPM: R로즈 변주곡’(2026). 다채널 테그노 사운드를 채우고 미로형 비닐풍성을 채웠다. 광주비엔날레 전시실 5곳 중 유일하게 입장티켓이 없이도 들어가 볼 수 있는 공간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2개국 43팀(작가)으로 참여작가를 줄인 대신 한 작가의 여러 작품을 반복적으로 내놓은 건 그간 없던 시도다. 전시관 안팎으로 광범위하게 흩어놓지 않고 단일 공간에 집약한 것도 새롭다. 전체적으로 다섯 개로 나뉜 방(분자와 나, 신체와 관계, 풍경과 배움, 우주와 변화, 공기와 발화 등)을 차례로 거쳐가게 한 구성인데. 다만 제주 화산암을 비롯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방마다 반복되는 특정 작가에 대해선 설명이 충분치 않다. 호추니엔 감독은 “빠르게 보고 지나치기보다 수십 년간 작가들이 이어온 ‘실천’의 결과물을 오래 바라보기를 바란다”고만 했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전경. 인도 작가 소흐랍 후라의 단채널 비디오 ‘해안’(2019, 17분 28초)이 흐르고 있다. 여신 칼리를 기리는 신도들이 타밀나두 해안에 모인 종교축제를 소재로 삼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중국관·대만관, 과연 명칭만 문제였을까
릴케에서 운을 뗀 ‘변화, 실천’은 호추니엔 감독과 작가들을 거쳐 관람객 하나하나에게 전달될 참이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전시 자체가 버퍼링에 걸린 모양새다. 문학에 미술까지 동원한 거대한 예술의 장인데 정작 정치라는 벽을 극복하지 못해서다. 하지만 이렇게만 보고 넘길 일인가. 만약 중국관·대만관이 함께했다면 32년째인 광주비엔날레가 이룬 주요 성과로 떠들썩했을지 모르겠다. 혹시라도 그걸 기대했다면 이번 주최측의 대처는 ‘사고’라고 봐야 한다. 그간 15회를 치른 국제행사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매뉴얼도 철학도 없는 대단히 느슨하고 안이한 대응 중이란 얘기다.
‘제16회 광주비엔날레’ 전경. 튀르기예 작가 인지 에비너의 거대한 다채널 비디오 ‘국민체조’(2013, 3분 30초)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체육관, 훈련시설, 교육공간을 배경으로 퍼포머들의 움직임을 콜라주했다. 국가라는 신체를 위해 개인의 신체가 규율되는 과정을 연결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지난 4일 개막 첫날 호추니엔 감독은 “비엔날레가 뭔지 명확히 해두는 게 중요하다”며 “광주비엔날레는 파빌리온과는 별개”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윤범모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본전시에만 집중했으면 했다”는 말에 더해 “중국관 철수는 안타깝지만 파빌리온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는 원론적인 답변을 꺼냈다. “예술은 예술, 정치는 정치니 둘을 겹쳐 보지 말아달라”는 당부도 붙였다. 정말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사실 더 심각하다. ‘네 삶을 바꿔야 한다’고 절절하게 풀어놓은, ‘예술이 품은 변화, 실천’에 몰입한 이번 광주비엔날레의 의미는 말짱 헛것이 될 테니까.
전남광주 북구 용봉동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전경. ‘너는 내 삶을 바꿔야 한다’는 테마 아래 22개국 43개 팀(작가)이 참여한 ‘제16회 광주비엔날레’는 오는 11월 15일까지 전시를 이어간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번 회차를 위해 광주비엔날레재단이 들인 예산은 약 160억원. 전시·행사에 40억원이 쓰이고 이 준비를 위한 2년에 걸쳐 나머지를 집행해 왔다. 30주년이던 지난 15회 때 역대 최대인 151억원을 투입했으니 그 규모도 훌쩍 넘긴 진짜 역대급이다. 전시는 11월 15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