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유경희의 톡톡아트]우리 안의 헤라

유경희 기자I 2012.09.10 14:43:58

질투하는 여자가 살아남는다!

바르베리니의 헤라, 바티칸 뮤지엄, 그리스 조각의 로만카피
[이데일리 유경희 칼럼니스트] 헤라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자주 분노하고 수치심을 느끼는 여신으로 등장한다. 남편 제우스가 천하의 바람둥이로 여신이건, 요정이건, 인간여성이건, 심지어 동성이건 가리지 않고 유혹하고 강간하고 임신시키고 다녔기 때문이다. 헤라는 제우스와 관련된 모든 여성과 그 자손에게 앙심을 품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그녀가 질투가 심한 여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질투심이 강하다는 것은 거의 생존 본능 같은 것이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에서 질투할 줄 아는 종족만이 살아남은 것인지 모른다. 여성들만의 전유물인 것처럼 돼있는 질투심은 사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에서 살아남기 위한 집단무의식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 다시 모계중심의 사회가 된다면, 질투는 더 이상 여성들의 전유물이 아닐 것이다. 이렇듯 질투의 신이라는 닉네임을 얻은 헤라는 고대 그리스 사회가 굳건히 지켜온 가부장적 질서의 이면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어쨌거나 헤라는 질투의 신이라기보다는 결혼과 가정을 지키는 수호신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녀는 고대 그리스 가부장적 질서의 사회에서 남편의 외도에도 불구하고 결혼의 신성함을 통해 가정을 굳건하게 지켜내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여신이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속사정은, 고대 그리스 사회가 아내라는 역할모델에 여신 중의 여신 헤라를 덧씌워, 명예를 주는 척 했을 뿐! 실제 부인의 삶은 참으로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렘브란트, 헤라 여신
헤라는 라틴어로 주노 혹은 유노(juno)이다. 영어로는 June 즉 6월이다. 6월의 여신이라! 참 풍요롭기 그지없는 것인데, 그녀는 자신이 풍요롭다고 상정한 결혼을 위해 자신의 풍성한 에너지를 다 써버린다. 헤라는 매일매일 처녀로 태어난다는 뜻, 새로 순결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헤라는 크로노스와 레아의 딸로, 제우스의 누나이자 동생이자 아내이다. 아버지 크로노스는 자신이 아버지 우라노스를 죽인 것처럼 자기자식들에 의해 죽음을 맞을까봐 두려워 아내 레아가 자식을 낳자마자 먹어 치운다. 어머니 레아는 자식들을 낳자마자 먹어치워 버리는 남편의 눈을 속여 막내아들 제우스를 빼돌려 키운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성장한 제우스는 예언대로 아버지 크로노스를 죽이고 아버지 뱃속에서 자신의 형제들을 구출해낸다. 이로써 원래 누이였던 헤라가 누나와 동생이 된 것이다.

헤라는 아리따운 처녀로 자라나게 된다. 그런데 다른 여자보다는 자기 의지가 강하고 보수적인 여자였던 탓일까? 제우스는 헤라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다른 여자들한테 갈 때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가야 함을 깨달았던 것. 황소, 백조, 독수리, 구름, 황금비로 변신했던 제우스가 이번엔 분위기를 바꾸어 처량한 뻐꾸기로 변신했던 것이다. 게다가 비바람까지 뿌리게 해 영락없이 한 마리 애처로운 뻐꾸기로 헤라의 창가로 달아든다. 헤라의 약점인 모성애를 자극했던 것! 비에 흠뻑 젖은 뻐꾸기를 가슴에 품자 제우스는 갑자기 본색을 드러내며 그녀를 겁탈하려 한다. 그러자 헤라는 결혼을 약속하지 않으면 절대 성관계를 맺을 수 없노라고 끝까지 저항했다. 제우스는 조강지처로서는 그녀가 내심 맘에 들었는지 혹은 눈앞의 욕망에 사로잡혔는지 덥석 그녀와의 결혼을 약속했던 것! 이것이 바로 헤라가 바람둥이 제우스의 아내가 된 사연이다.

헤라와 제우스, 안니발레 카라치, 16세기
결혼을 한 다음에도 제우스의 애정행각은 멈추지 않았고, 헤라의 해바라기 인생은 시작됐다. 제우스는 헤라가 신성시하는 결혼을 번번히 모욕하고 파괴하기에 이른다. 제우스는 바람피우는 것도 모자라 다른 여인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끔찍하게 편애함으로써 헤라를 더 수치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제우스는 애첩들을 통해 그리스 신화 최고의 신들을 탄생시켰다. 아폴론, 헤르메스, 디오니소스, 아테나, 아르테미스 등등 이름만 들어도 멋진 완전 `엄친아(딸)`들이다. 이해 비해 헤라가 낳은 자식은 아레스(전쟁의 신), 에일레튀이아(출산의 여신), 헤베(청춘의 여신), 에리스(불화의 여신), 헤파이스토스(대장장이 신), 반인반수의 괴물 티폰 등 애첩들이 낳은 자식들에 비하면 B급 신들이다. 헤라가 애지중지하는 아들 아레스(마르스)만 해도 그렇다. 전쟁의 신이기는 하지만, 정작 지혜로운 전쟁은 아테나가 관장하고, 아레스는 좀 불필요하고 무모한 전쟁의 신이 됐다. 게다가 아테나를 혼자서 나은 제우스에 복수하느라고 헤라가 혼자 아이를 낳은 것이 올림포스의 신궁 최대의 추남 헤파이스토스가 아닌가! 여하튼 헤라가 낳은 자식들은 첩들이 낳은 자식에 비해 인물도, 행색도, 지혜도 부족한 찌질남이다. 역사에서도 정실의 자식들보다 첩의 자식, 데려다 기른 자식들이 훨씬 더 똘똘하게 앞가림을 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헤라는 어떤 식으로든 자기 가정을 굳건하게 지켜내는 게 가장 큰 임무라고 생각했다. 우선 제우스가 불륜을 저지르는 걸 막을 순 없다손 치더라도, 자기 자식들에게 배다른 형제들을 안겨주지는 말아야겠다는 의지를 강화한다. 예컨대 제우스가 불륜으로 나은 아들이 올림포스의 최고신이 될 것이라는 말에, 훗날 아폴론의 어미가 될 레토가 해산하지 못하도록 자기 딸인 해산의 여신 에일레튀이아에게 그녀가 어디에서도 몸을 풀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서슴지 않는다. 이렇듯 헤라는 제우스의 여자들을 괴롭히고 죽이는 것은 물론 그녀가 나은 아이들까지 위협한다.

헤라클레스가 뱀을 잡는 모습을 지켜보는 암피트리온과 알크메네, 폼페이벽화
그 대표적인 스토리가 바로 영웅 헤라클레스에 관한 것이다. 헤라는 제우스가 바람 피워 나은 아들 헤라클레스를 죽이려고 모략을 꾸민다. 제우스는 정숙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유부녀인 알크메네를 유혹한다. 그것도 알크메네의 남편 암피트리온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이런 사실을 모르는 암피트리온 역시 그날 밤 알크메네와 동침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자식들이 알키데스(헤라클레스의 어렸을 적 이름)와 이피클레스다. 제우스는 이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헤라의 영광’이라는 뜻의 헤라클레스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태어날 아들에게 향할 헤라의 분노를 좀 누그러뜨리려고 마련한 제우스의 비책이었을까?

헤라클레스는 태어나면서부터 힘이 남달랐다. 제우스는 그런 헤라클레스를 불사의 몸으로 만들고자 잠든 헤라의 젖을 물리게 된다. 어미인 인간의 젖보다는 헤라의 젖을 물리면 신과 같은 위력을 지닐 것이라 계산한 것! 헤라클레스가 젖을 빠는 힘이 어찌나 셌던지 헤라는 놀라 깨어났고, 젖에서 입을 떼도 젖이 뿜어져 나왔다. 이것이 바로 ‘젖 길(via Lactea)’ 즉 우유를 뿌려놓은 것 같은 은하수의 탄생이다. 그리고 지상에 떨어진 젖은 백합이 됐다. 그로써 백합은 헤라를 상징(마리아를 상징하기도 함)하는 꽃이 됐다. 백합은 결혼하는 신부의 부케로 쓰이면서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보다 결혼과 일부일처제를 관장하는 여신 헤라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틴토레토, 은하수의 기원, 1575년경
이 일로 헤라의 분노는 더하면 더했지 누그러지지 않았다. 헤라는 헤라클레스가 태어난 지 9일 째 되던 날, 요람에 독사 두 마리를 풀어놓는다. 젖먹이 헤라클레스는 괴력을 발휘해 독사를 목 졸라 죽인다. 그럼에도 헤라의 저주는 계속됐다. 청년이 된 헤라클레스는 테바이의 왕 크레온의 딸 메가라와 결혼해 세 자녀를 얻게 되지만 헤라의 간계에 빠져 실성한 아내와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이게 된다. 제 정신으로 돌아온 헤라클레스는 죄를 씻기 위한 신탁을 받기 위해 델포이로 향했고, 12개의 과업을 받는다. 헤라의 복수는 이렇게 잔인하다. 여성의 앙심이 오뉴월 서릿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조차 참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화다.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