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더스토리’(INDUSTORY)
현대 산업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요소들의 과거와 현재를 역사·정치·문화·기술·경제 등 복합적인 시선으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능력을 기른다. 현대 문명의 기반이 된 ‘철’(鐵)과 ‘사’(沙·모래)부터 코로나19 사태로 주목받고 있는 ‘약’(藥), ‘의’(醫) 등 이 세상 모든 산업의 역사를 다룬다.
☆ 임규태 공학자·교육자·기업가
미국 조지아공대에서 15년간 교수로 재직. 조지아공대 부설 전자설계연구소 부소장, 조지아공대 기업혁신센터 국제협력 수석고문. 국제 통신표준화 의장. 빅데이터·소프트웨어·게임·블록체인·기후변화 등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에 참여.
|
|
BC 1600년 탄생한 히타이트 제국은 다시 한 번 바퀴 혁명을 일으켰다. 바큇살을 발명한 것이다. 히타이트인들은 원형 나무판 가운데를 파내고 바큇살을 덧대는 방식으로 바퀴의 내구성과 승차감을 높였다. BC 1300년 무렵 히타이트 제국과 이집트 간에 벌어진 ‘카데시 전투’에서는 양측에서 도합 마차 5000~6000대가 동원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비슷한 시기 중국 상나라의 수도 은허 부근에서도 바큇살 달린 마차 유물이 발견됐다. 현재까지 발견된 기록으로만 추정해도 바큇살 달린 바퀴와 이를 이용한 마차는 5500년 동안 인류의 탈 것을 지배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
◇ 나무 바퀴에서 고무 타이어까지
19세기 초반 수천 년 동안 정체해온 바퀴는 다시 한 번 혁신의 계기를 맞게 된다. 1818년 독일의 바론 칼 폰 드라이스가 자전거를 발명한 것이다. 그가 처음 만든 자전거는 방향 전환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직접 발로 땅을 차서 바퀴를 움직이는 구조였다. 이후 페달을 밟아 움직이는 현재의 자전거로 빠르게 개량되었지만 당시 사람들의 불만은 컸다. 자전거는 사람이 탑승자이자 동력원이기 때문에 바퀴의 내구성과 승차감이 마차보다 중요했다. 발명가들이 바퀴의 혁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이유다.
1846년 스코틀랜드의 로버트 톰슨은 동남아시아에서 대량 수입하기 시작한 ‘고무’라는 신물질에 주목한다. 그는 바퀴에 고무를 덧대면 마찰력에 의한 추진력을 높이고 승차감도 개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고무타이어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바퀴에 고무만 덧 댄 타이어는 여전히 딱딱했고 도로에서 장애물에 걸렸을 때 충격을 흡수하기 어려웠다.
|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공기 튜브 타이어가 발명된 배경이다. 그는 이 아이디어로 1889년 타이어 회사 ‘던롭’을 창업했다.
자전거에만 사용하던 공기 튜브 타이어는 1895년 프랑스 ‘파리-보르도 랠리’에서 처음 자동차에 적용된다. 이 대회에 참가한 푸조 ‘르클레어’는 세계 최초로 공기 튜브 타이어를 장착한 자동차로 기록된다. 푸조가 장착한 타이어는 프랑스 미쉐린 형제가 제작했다. 바로 오늘날 세계 3대 타이어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미쉐린’의 창업주다.
|
◇ 탈것의 진화… 증기기관과 내연기관
1705년 토머스 뉴커먼이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산업혁명이 시작된다. 증기기관이 만들어낸 동력은 다양한 기계를 돌리는데 쓰였다. 일부 발명가들은 이동수단으로 활용하는데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1769년 프랑스 공병 장교 니콜라스 퀴뇨는 대포를 끌기 위해 세계 최초로 증기자동차를 만들어냈다. 증기기관을 활용한 대표적 운송수단으로 알려진 조지 스티븐슨의 증기기관차보다 무려 56년이나 앞서 발명된 것이다.
1801년 영국의 발명가 리처드 트레비식이 상용 증기자동차를 개발하면서 영국에서 증기자동차 시대가 열렸다. 트레비식 증기자동차를 이용해 택시, 버스 등 다양한 교통 산업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기술 발전을 거듭한 증기자동차는 시속 30㎞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다.
|
1860년 프랑스 기술자 에티엔 르누아르는 폭발력을 이용해 회전운동을 하는 최초의 내연기관을 고안해냈다. 르누아르 엔진에 영감을 얻은 독일의 니콜라스 오토는 산업용 내연기관을 만들고자 유능한 기술자였던 고틀리프 다임러와 빌헬름 마이바흐를 영입했다. 두 엔지니어의 합류로 오토 사이클이라는 내연기관이 완성됐다. 하지만 오토는 대규모 산업용 내연기관에 관심이 있었고 다임러와 마이바흐가 제시한 소형 경량 내연기관 아이디어를 묵살했다. 결국 두 사람은 오토 회사를 떠나 탈 것에 장착할 수 있는 소형 경량 내연기관을 개발하기 시작한다.
|
◇ 대중 앞에 등장한 내연기관 자동차
특허소송을 통해 오토의 내연기관 특허를 무력화 시키는데 성공한 다임러는 1885년 마이바흐와 함께 내연기관을 자전거에 장착한 ‘라이트 바겐’을 선보인다. 라이트 바겐은 내연기관을 사용한 최초의 오토바이로 기록된다. 두 사람은 다시 1886년 내연기관을 마차에 장착한 내연기관 사륜 자동차 ‘다임러 모터마차’를 발표한다. 다만 ‘다임러 모터마차’가 첫 내연기관 자동차는 아니었다.
1885년 다임러의 공장과 불과 100km 떨어진 맨하임에서 칼 벤츠가 액체 연료를 사용한 최초의 내연기관 자동차 ‘모터바겐’을 완성했다. 카를의 아내인 베르타 벤츠는 두 아들과 함께 개량 모델 ‘모터바겐3’을 몰고 104㎞ 떨어진 친정을 왕복 운전했다. 이 여행은 자동차를 이용한 최초의 장거리 운전으로 기록된다. 유능한 공학자였던 베르타 벤츠는 내리막길에서 속도 조절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브레이크 라이닝’ 아이디어를 개발했다.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다임러의 내연기관이 소개됐다. 다임러의 내연기관에 적극 관심을 보인 여성이 있었다. 루이스 사라쟁이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다임러의 내연기관을 이용한 자동차 사업을 제안했고 사별한 그녀의 남편과 친분이 있던 다임러는 이를 흔쾌히 수락한다. 이후 사라쟁은 기술자 르네 파나르, 에밀 르바소를 영입해 1889년 ‘파나르-르바소’라는 자동차 회사를 세운다.
|
20세기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주요 운송수단의 지위는 마차가 누리고 있었고, 자동차 시장의 주류 또한 증기자동차였다. 파나르-르바소가 자동차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내연기관 자동차는 여전히 부호들의 값비싼 취미용품 정도로 여겨졌다. 1900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내연기관 자동차가 기존의 운송·이동수단을 송두리째 대체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데일리와 이데일리의 지식인 서포터스, 오피니언 리더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경제 인문학 토크 콘서트입니다. 우리 시대 ‘지성인’(至成人·men of success)들이 남과 다른 위대한 생각을 발굴하고 제안해 성공에 이르도록 돕는 프로그램으로, 이데일리 창립 20주년을 맞아 기획했습니다. ‘위대한 생각’은 매주 화요일 오후 6시 이데일리TV에서도 만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