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계급·자본 넘어 ‘연결’ 가능성 질문 설경구 슬픈 눈·전도연 노래가 남긴 여운 한국 영화 향한 넷플릭스의 ‘가능한 사랑’ 답 대신 물음표 남기며 관객에 생각거리
[이데일리 스타in 윤기백 기자] 영화가 끝난 뒤에도 질문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희미해지고 노동의 가치마저 흔들리는 시대에 영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타인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행위는 어디까지 정당한지, 누군가의 삶을 영화의 재료로 삼으면서도 그것을 착취하지 않을 수 있는지까지 끊임없이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영화 '가능한 사랑'의 한 장면.(사진=넷플릭스)
흥미로운 건 이창동 감독이 이 질문에서 자신을 예외로 두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큐멘터리 감독 예지(조여정)는 창작자로서 이창동 감독의 고민이 짙게 투영된 인물로 읽힌다. 해고 노동자의 삶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예지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카메라 뒤에 선 창작자의 윤리와 마주하게 된다.
이창동 감독이 과거 해고 노동자의 이야기를 구상했다가 한 차례 포기했다는 사연도 작품과 맞닿아 있다. 이미 실제 노동자들의 고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이를 다시 극영화로 옮기는 일이 또 다른 소비가 되지는 않을지 고민했다는 것이다. 한 번 내려놓았던 이야기를 노동 자체가 위기에 놓인 지금 다시 꺼내 들었다는 점에서 작품의 문제의식은 더욱 선명해진다.
그 질문을 가장 아프게 몸으로 받아내는 인물은 호석(설경구)이다. 설경구는 유난히 슬픈 눈으로 해고 이후 무너진 한 인간의 시간을 쌓아간다. 큰 동작이나 설명보다 굳은 얼굴과 멈칫하는 시선에 상실한 자존감과 분노를 눌러 담는다. 그래서 후반부 감정이 폭발하는 순간의 파괴력이 크다. 오랫동안 안으로 삼켜온 실패와 모멸, 상처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특히 호석이 아내 미옥 앞이 아닌 예지의 카메라 앞에서야 마음을 드러낸다는 설정은 영화가 던지는 창작과 착취의 질문과 다시 맞물린다.
영화 '가능한 사랑'의 한 장면.(사진=넷플릭스)
전도연이 연기한 미옥은 그 무거움을 다른 결로 떠받친다. 미옥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자신을 쉽게 연민하지 않는다. 날카롭고 무심한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상대에게 손을 내민다. 특히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르는 장면은 미옥이라는 인물을 압축해 보여준다. 전도연은 감정을 과장하지 않고 오히려 힘을 빼면서 장면을 완성한다. 그 덕분에 영화가 묻는 ‘가능한 사랑’의 의미도 더 선명하게 다가온다.
상우(조인성)는 이들과 정반대편에 놓인 인물이다. 수영을 하고, 클라리넷을 불고, 영어와 태권도를 하고, 커피를 내린다. 이것저것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영화 속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큰 힘은 상우가 갖고 있다. 이창동 감독이 표현한 ‘자본의 의인화’다. 노동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이 노동하는 이들의 삶을 좌우한다는 아이러니다. 좀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던 상우가 화장실에서 웃는 장면이 유독 섬뜩하게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영화 '가능한 사랑' 포스터.(사진=넷플릭스)
영화 초반 흩어져 있던 장면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왜 제목은 ‘가능한 사랑’인지, 왜 미옥은 ‘사랑밖엔 난 몰라’를 부르는지, 왜 영화는 ‘남의 것을 탐하지 말라’는 십계명으로 시작하는지 하나씩 연결된다. 노동과 계급, 자본과 착취, 창작자의 윤리처럼 서로 달라 보였던 문제들은 결국 멀어진 사람과 사람이 다시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묻는 이야기로 모인다.
마지막 달 장면은 이에 대한 가장 조심스러운 답처럼 보인다. 실패와 배신의 기억이 남은 대리석 평상에 호석과 미옥이 나란히 앉아 술을 마시고 달을 바라본다. 계급도, 가진 것도, 살아온 방식도 다르지만 달은 누구에게나 같은 모습으로 떠 있다. 거창한 화해나 완벽한 해결은 없다. 다만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본다. 영화가 말하는 ‘가능한 사랑’은 어쩌면 그 정도의 작은 연결에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해고’를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점에서는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떠오르기도 한다. 다만 접근 방식은 전혀 다르다. ‘어쩔수가없다’가 블랙코미디와 장르적 쾌감으로 해고와 생존의 문제를 풀어낸다면, ‘가능한 사랑’은 쉽고 빠른 길을 택하지 않는다. 질문을 오래 붙들고 천천히 파고든다. 같은 현실을 바라보면서도 장르와 리듬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적 경험이 만들어진다.
영화 '가능한 사랑'의 한 장면.(사진=넷플릭스)
어렵다는 평가도 있지만 모든 것을 한 번에 이해해야 하는 영화는 아니다. 노동의 문제로 읽어도 좋고, 계급의 문제로 읽어도 좋다. 창작자의 윤리에 관한 영화로 볼 수도 있고, 결국 사람과 사람이 다시 연결되는 과정에 관한 사랑 이야기로 받아들여도 된다. 이해한 만큼, 느낀 만큼 가져갈 수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이창동 감독이 수상 소감에서 던졌던 질문이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이 사라지고 노동의 가치가 희미해지는 시대에 영화는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능한 사랑’은 답을 대신 써주지 않는다. 감독과 배우, 관객이 영화라는 매개를 사이에 두고 함께 답을 찾아가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 질문은 작품 바깥에서도 이어진다. 이처럼 묵직하고 오래 숙성해야 하는 영화를 완성한 곳이 넷플릭스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한때 극장과 한국영화 생태계에 큰 변화를 가져온 스트리밍 플랫폼이, 정작 국내 투자시장이 위축된 지금은 쉽게 만들어지기 어려운 작품에 제작비와 창작 환경을 제공했다.
레거시 영화의 가치를 누구보다 오래 지켜온 감독의 신작을 스트리밍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넷플릭스가 품었다는 점은 역설적이면서도 흥미롭다. ‘가능한 사랑’이 영화 안에서 서로 다른 존재 사이의 연결 가능성을 묻는 작품이라면, 작품 밖에서도 또 다른 형태의 연결이 이뤄진 셈이다. 어쩌면 이것 역시 한국 영화를 향한 넷플릭스의 ‘가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