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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바 구하던 50대, 20억대 보이스피싱 공범 되다[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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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원 기자I 2025.11.25 07:00:00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기(19)
''부동산 임장 알바''에 지원했다가 수거책 전락
21명 상대 20억5500만원 편취…1심 징역 5년

[편집자 주] 서민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사기 범죄는 시간이 지날수록 지능화, 조직화, 대형화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기의 종류와 수법 등도 다양하면서 검(檢)·경(警)의 대응도 임계치에 다다를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습니다. 이데일리는 사기 범죄에 대한 경각심 확대 차원에서 과거 사기 범죄 사건을 재조명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기(꼬꼬사)’를 연재합니다. 사기 범죄의 유형과 수법 그리고 처벌에 이르는 스토리텔링을 통해 만약 발생할 수 있는 범죄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

사진=챗GPT 달리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2023년 11월, 구직 사이트를 뒤지던 A씨(51)의 눈에 매력적인 공고가 들어왔다. ‘부동산 사전조사, 재택근무 가능, 월급 200만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던 A씨는 망설임 없이 지원했다. 면접도 없이 메신저로 근로계약서만 주고받았지만, A씨는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평범한 알바’는 20억원대 보이스피싱 범죄의 시작이었다.

철저히 계획된 ‘정상 회사’ 위장

A씨를 모집한 조직은 치밀했다. 2023년 11월 17일과 28일부터 12월 3일까지 이른바 ‘수습 기간’을 거쳤다. A씨는 지시받은 아파트와 상가를 방문해 주변 지하철역까지의 거리, 마트 위치, 유동인구 등을 조사하고 사진을 찍어 보냈다. 실제 부동산 조사 업무처럼 보였다.

12월 4일, A씨는 ‘정식 채용’됐다. 조직은 ‘정규직 수당표’까지 보내왔다. “시장 사전조사 5만원, 상가조사 6만원, 서류탁송 5만 5000원, 계약금 회수 8만원”. 여기서 범죄의 실체가 드러났지만, A씨는 알아채지 못했다.

“검사입니다, 당신 계좌가 범죄에 연루됐습니다”

2023년 12월 13일, A씨는 첫 ‘계약금 회수 업무’ 지시를 받았다. 조직이 보낸 매뉴얼에는 섬뜩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고객님 인상착의 숙지, 현금이면 단호히 거절, 명함이나 번호 요구시 개인정보보호법상 불가, 조용한 곳에서 수표 사진 전송”

그 무렵,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는 K씨가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자신을 검사와 금융감독원 직원이라 소개했다. “당신 명의 계좌가 성매매와 자금세탁 범죄에 연루됐습니다. 피해자임을 증명하려면 계좌의 현금을 수표로 바꿔 우리가 보내는 직원에게 전달하세요. 무혐의 확정되면 돌려드립니다.”

K씨는 은행에서 1억원짜리 수표를 뽑았다. 12월 15일 오전 9시 40분, 서울 관악구의 한 호텔 앞. K씨는 나타난 중년 남성(A씨)에게 떨리는 손으로 수표를 건넸다. A씨는 아무런 영수증이나 신분증 제시 없이 수표를 받아 사라졌다.

전국을 누빈 수표 수거책

이후 A씨의 행적은 범죄 조직의 체계적 운영을 보여준다.

D씨는 서울중앙지검 검사와 경찰청 수사관을 사칭한 전화를 받았다. “계좌가 대포통장으로 제공됐다. 구속수사 대신 약식수사를 받게 해주겠다. 대출을 받아 수표로 인출해 직원에게 전달하라.” D씨는 12월 14일 강남의 호텔 앞에서 A씨에게 6600만원을 건넸다. 다음 날 같은 피해자는 다시 2300만원을 전달했다.

W씨에게는 대검찰청 사무관과 금감원 직원을 사칭한 전화가 왔다. “대포통장 범죄 연루, 자산 투명성 검증 필요.” 12월 27일, 동대문구의 한 모텔 앞에서 9100만원이 A씨 손으로 넘어갔다.

Z씨는 “베트남에서 카드 신청 이력이 있다”는 문자를 받고 전화했다가 “사기 사건 관련자 200여명, 공탁금 5000만원 필요”라는 말에 속았다. 대학교 앞에서 수표를 건넸다.

한 달간 21명 피해…20억5500만원 증발

2023년 12월 13일부터 2024년 1월 17일까지 단 36일. A씨가 움직인 날은 19일이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A씨는 서울, 대전, 동두천, 인천, 부산 등 전국을 누비며 21명의 피해자로부터 55장의 수표를 받았다. 총액 20억5500만원.

A씨는 받은 수표를 조직이 지정한 사람에게 전달했다. 노란 머리의 남성, ‘맥가이버 머리’를 한 남성 등 은행 직원으로 보기 어려운 외모였다. 한 번은 수표 금액을 확인하자 “왜 그런 얘기를 하냐, 하면 안 된다”는 핀잔을 들었다.

A씨는 이 기간 월급 200만원을 포함해 총 851만원을 받았다. 부동산 조사 경험도 없는 사람이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에 받기에는 과도한 금액이었다.

“부동산 알바인 줄 알았다” vs “알고도 했다”

재판에서 A씨는 “부동산 계약금 회수 업무로 알고 일했다. 보이스피싱인 줄 몰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북부지방법원 제13형사부(재판장 나상훈)는 지난 9월 23일 A씨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판결문에는 A씨의 범행 인식을 입증하는 정황들이 나열됐다.

재판부는 “51세 성인으로 30년간 영업 경력이 있는 사람이 대면 면접도 없이 채용됐다. 전국을 다니며 거액 수표를 노상에서 받는 것이 정상적 업무인지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명함이나 번호 요구시 개인정보보호법상 불가’라는 매뉴얼, 영수증 없는 수표 전달, 신원 확인 거부 등 모든 정황이 범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재판부는 “피해자 D씨는 A씨가 ‘안녕하세요 과장입니다’라고 했다고 진술했고, 피해자 여러 명이 A씨에게 ‘금감원 직원 맞냐, 국세청 직원 맞냐’고 물었을 때 A씨가 긍정하는 반응을 보였다”고 지적했다.

피해자 대부분은 평생 모은 돈을 잃었다. 한 피해자는 2억원을 두 차례에 걸쳐 빼앗겼다. 재판부는 A씨에게 피해자 6명에게 총 5억6000만원을 배상하라고 명령했지만, 개인회생 절차 중인 A씨에게서 돈을 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일부 피해자는 “범죄 조직의 말단이라고 하지만, 그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면 우리 돈은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A씨의 엄벌을 탄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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