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7월부터 영변 핵시설을 재가동한 징후가 있다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고서가 공개되자 정부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북한이 주요 협상 때마다 영변 카드를 꺼낸 전력을 감안하면 대미 협상용일 가능성이 크지만, 정부가 이 사실을 미리 알고서도 남북 통신선 복원을 무리하게 추진한 것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이 나온다. 임기 말 남북 대화와 북미 비핵화 협상에 속도를 내려던 문재인 정부의 대북 정책에도 먹구름이 끼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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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정권이 2년6개월 만에 ‘영변 핵시설’을 다시 돌리기 시작한 이유는 바이든 행정부가 ‘조건 없는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대화 재개의 실질적 움직임이 없자 본격적인 대미 압박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추가 제재를 피하면서도 미국을 다시 협상장으로 불러낼 수 있는 선택안을 고르다 보니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비해 강도가 낮은 영변 재가동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도 북측의 영변 원자로 재가동에 대해 “예상됐던 일”이라면서 “미국에 약속하지 않은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도발을 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바이든 정부의 대북정책이 그럭저럭 상황 관리만 하는 이른바 오바마 정부의 전략적 인내로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을 수 있다는 얘기다. 북한이 경제 제재 완화 등 목표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가 아닌 그나마 낮은 수위에서 자기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이다. 전형적인 북한의 화전양면술로, 조건 없는 대화를 촉구해온 미국 압박용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전언이다.
다만 원자로를 재가동한 7월은 남북 정상간 친서가 오갔던 시점인 만큼,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조기 재가동을 위해 한미 연합훈련 축소 등 북한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한 것 아니냐는 야권의 비판이 커지는 상황이다.
당장 국민의힘 허은아 수석대변인은 지난달 30일 논평을 내고 “냉엄한 현실을 외면한 문재인 정권의 일방적인 대북 구애의 끝은 결국 돌고 돌아 또다시 ‘핵’이었다”면서 “대북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사과하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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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외교당국은 머쓱해졌다. 미국은 4월 말 대북정책 검토 완료 직후부터 북한에 대화를 제의해왔던 데다, 최근엔 대북 인도적 지원을 고리로 교착 상태에 놓인 남북미 관계를 모색하고 있었던 만큼 북한에 뒤통수를 맞은 꼴이 됐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달 21~24일 방한했던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23일 서울에서 한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를 갖고 “나는 여전히 북한의 대화 상대들과 언제 어디서든 만날 준비가 돼 있다”며 6월에 이어 또 조건 없는 북미대화를 제의했다.
지난달 29일(현지시간) 워싱턴을 방문한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도 “가급적 여러 분야에서 북한과의 인도적 협력이 가능하도록 패키지를 만들어가고자 미국 측과 협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 일간 월스트리트저널은 영변 원자로 재가동 등 북핵 문제가 아프가니스탄 철군, 이란 핵합의(JCPOA) 교착 등에 이어 바이든 정부 외교정책의 새로운 난제로 부상했다고 해석한다.
김준형 전 국립외교원장은 “결국 미국이 먼저 움직여야 된다는 일종의 사인으로 볼 수는 있다”며 “바이든 정부에는 하나의 도전거리지만, 판 자체를 깨는 그런 수준의 도발은 아니다”고 관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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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북한은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이 없는 상황이다. 지난달 10일 한미훈련 실시에 반발해 13개월만에 복구했던 남북 연락채널을 다시 단절한 뒤 우리측 정기통화 시도에 응답하지 않고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한미 양국은 당분간 상황을 지켜보겠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이면서도 영변 핵시설 재가동과 무관하게 ‘남북미 대화 재개’의 뜻을 견지했다. 사실상 한미 양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보고서가 나오기 전부터 영변의 움직임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앞서 청와대 관계자는 지난달 31일 “북한의 핵 능력 고도화가 지속되는 상황은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북 관여가 시급하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젠 사키 미 백악관 대변인도 브리핑에서 “보고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이룰 수 있도록 대화와 외교에 대한 긴급한 필요성을 강조한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한미 당국은 대북 인도적 지원을 대화의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방침이다. 노 본부장은 워싱턴DC에서 김 대표와 만난 뒤 “정부는 긴밀한 한미 공조 하에 북한의 WMD(대량살상무기) 관련 활동을 계속 예의주시해 왔다”며 “북핵 문제가 외교와 대화를 통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라는 데 한미 간 인식을 같이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 역시 “외교를 통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추진이라는 공통된 약속을 재확인했다. 북한으로부터 답변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미국이 북측이 원하는 제재 완화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어 북미대화는 당분간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이 대외적으로 영변 핵시설이 유효한 협상 카드임을 내세운 것으로 보아 북미 간 줄다리기가 힘겹게 펼쳐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특히 성 김 대표는 냉각탑 폭파까지 본 인물로, 북한 의도와 속셈을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북핵 해법의 ‘새판 짜기’도 불가피해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핵시설 재가동 움직임이 포착된 만큼 북한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신범철 경제사회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북한에 대해 인도적 지원은 해야겠지만 북한의 영변 핵시설 재가동 징후가 언론을 통해 다뤄진 상황”이라며 “정부가 북측의 핵능력 고도화는 어떻게 막을 것이고, 억제력은 어떻게 갖출 것인지 등에 대한 대국민 메시지를 발신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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